2005년 1월 1일, G건설에 입사했다.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허나 내 바람과는 달리 온갖 법석을 떨며 원하던 팀까지 들어갔건만 나는 계속해서 방황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 목걸이를 차고 열심히 출근하고 퇴근했지만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불편했다. 불편한 마음이 절정에 다다른 날, 퇴근을 하고 집에 와 나의 바람을 종이에 적어보았다. 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너무 거창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원하는 바를 끼적여 보았다.
나는
혼자서 완성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싶었고 좋아하는 영어 공부도 마음껏 하고 싶었다.
퍼즐을 완성해 보니 ‘번역가’라는 세 글자가 종이 위로 떠올랐다. 남의 글을 소화해 내 글로 내보이는 번역가가 나와 합이 맞았다. 그렇게 번역가가 되었다. 번역을 한다고 하니 주위에서 물었다.
“그거 해서 먹고살 수는 있는 거야?”
“그럼 이제 영화 자막 끝에 네 이름이 나오고 그러는 거야?”
“프리랜서로 일하겠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당장 내 밥벌이가 걱정이었다. 부모님도, 아니 나 자신조차 확신이 없었다.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까. 나에게는 예술가 같은 헝그리 정신도, 빈곤함과 초라함을 견딜 당당한 민낯도 없었다.
나는 ‘돈’을 원했다. 나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해 줄 돈을 외면한 채 고상한 척 굴고 싶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번역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돈을 벌고 있으며 번역료는 (아주 더디지만)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에이전시와 일하다가 출판사와 직접 일하게 되면서 수입은 2배가량 늘었고(원체 상당히 낮았으니 오해 말기를) 출판사와의 거래에서도 조금씩 몸값을 올리고 있다. 그러니 먹고살 수 있을 거라는 염려는 접기 바란다. 나도 ‘돈’을 좋아한다.
번역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들은 유명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버젓이 등장할 거라 기대한다. 그러려면 내가 일단 영상 번역을 해야 하고 설사 영상 번역을 한다 해도 영화 자막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유명한 영화를 번역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연예인의 생활이 전부 화려할 거라 단정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프리랜서로 일하냐는 질문 속에는 아침마다 커피숍으로 출근하는 멋진 생활을 네가 하게 되었냐는 질투 어린 속뜻이 숨어 있다. 모든 번역가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프리랜서로 일한다. 다만 모두가 상상하는 것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일하지는 않는다.
번역서의 비중이 날로 증가하고 있지만 번역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은 제자리다.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오해가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가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가장 흔한 오해를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
번역, 다 같은 것일까?
번역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이에 대해 상세히 그리고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번역하면 영화 번역이나 출판 번역만 떠올린다. 번역은 크게 출판 번역, 영상 번역, 기술 번역으로 나뉜다.
출판 번역은 책을 번역하는 일로 문학 번역과 비문학 번역으로 나뉜다. 문학 번역은 소설, 에세이, 시 같은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일로 문학 번역을 하려면 문학적 소질을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번역을 하는 사람도 괴롭고 그 번역본을 읽는 독자도 괴롭다. 문학 번역가는 외국어 실력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적 지식은 물론 소설가 뺨치는 문장 구사 능력도 필요하다. 문체와 느낌을 살려 번역하지 않으면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원문의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
문학 번역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는 인문, 경제, 사회과학, 철학, 과학, 의학, 종교, 심리학, 예술 등 실로 다양하다. 어느 정도 이름이 난 번역가를 제외하고는 번역가 본인이 번역할 책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 번 거절했다가 계속해서 일이 들어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의뢰가 들어온 책은 가능한 한 맡을 수밖에 없다 보니 비문학 번역가 중에는 소위 ‘잡식형’ 번역가가 많다.
‘출판 번역’이라고 하면 대부분 외국어에서 한국어로의 번역을 생각하지만 한국 작품을 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 내가 살고 있는 뉴욕의 책방에 가도 영어로 번역된 한국어 문학 작품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영상 번역은 영화, DVD,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영상물을 번역하는 일이다. 외국 영상물의 수입, 국내 영상물의 수출로 일 자체는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DVD나 케이블 영상 번역이다. 영화 번역의 비중은 아주 적으며 소수의 번역가에게 편중되어 있다. 따라서 영상 번역을 하면 무조건 영화 번역을 하게 된다는 건 큰 오해다.
영상 번역 역시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류의 영향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 TV 프로그램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한국어 자막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상 번역은 번역이라는 작업 외에도 글자 수를 적정하게 맞추는 일 또한 중요하다. 자막을 보는 관객이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어야 하므로 지나치게 긴 문장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정해진 글자 수 내에서 자연스러운 한국어나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출판 번역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기술 번역은 제품 사용 설명서, 계약서, 매뉴얼, 논문 등 문서를 번역하는 일이다. 기술 번역 시장이 상당히 큰 데도 사람들은 번역하면 출판이나 영상 번역을 먼저 떠올린다. 기술 번역은 출판이나 영상 번역과는 달리 번역가 개인의 이름이 남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나 개인 고객의 번역 수요를 생각해 보면 기술 번역 시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술 번역 중에서도 법률이나 특허 같은 분야는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관련 배경 지식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만큼 번역료도 다른 분야에 비해 높다. 다만 관련 배경 지식이 없으면 번역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 오래 근무한 뒤에 특정 분야의 기술 번역가로 전향하는 사례가 많다.
기술 번역은 번역료의 편차가 가장 크다. 번역의 질과 중요도에 따라 장 당 5천 원에서 5만 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기술 번역가는 한국어에서 외국어로, 외국어에서 한국어로 둘 다 번역할 줄 알아야 한다. 출판 번역이나 영상 번역은 번역가별로 자신이 주로 하는 분야가 정해져 있어 양 분야를 넘나드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기술 번역은 양방향 모두 골고루 의뢰가 들어오기 때문에 어떠한 의뢰가 들어오더라도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번역을 주업으로 할 수 있을까?
‘번역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번역은 부업으로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번역일이 나에게 얼마나 절실한지에 따라 번역은 본업이 될 수도, 부업이 될 수도 있다. 권남희 번역가는 《번역은 내 운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번역은 여자들의 부업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스스로가 미리 단정 짓고 하는 일은 평생 본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직업이 번역이라면 어떡하든 열심히 해서 가족들에게 넉넉한 의식을 공급하는 가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결국 아무도 통제하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번역은 본업이 되기도 하고 부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한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면 본업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잴 거 다 재고, 뺄 거 다 빼는 사람은 번역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부업으로밖에 일을 못 한다.
초보 번역가는 안정권에 들어서기 전까지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다 그렇지 않나? 1, 2년 해 보고 아, 쉽지 않구나 포기하는 사람은 직장 생활을 해도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다.
번역, 아무나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번역을 할 수 있는 특별한 학위나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은 번역을 만만하게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던 과거 직장 동료는 “정 할 거 없음 번역이나 하지.”라고 말하곤 했다. ‘번역이나 하지’는 번역을 위해 오늘도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번역가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번역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원서로 공부하는 요즘 대학생들과 유학생들은 번역을 만만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번역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들은 번역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안다. 많은 사람이 해석은 할 수 있지만 번역은 하지 못한다. 둘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뒤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중요한 것은 한국어 실력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번역의 세계에 뛰어들었다가 좌절하는 사람이 많다. ‘난 외국어를 잘하니까 번역 한 번 해봐야지’, 혹은 ‘쟤는 외국어를 잘하니까 번역도 잘할 거야.’라는 생각은 이제 잊었으면 한다. 번역은 아무나 할 수는 있지만 모두가 잘 하기는 쉽지 않다.
번역을 잘하면 통역도 잘하는 거 아닌가?
번역을 잘하면 당연히 통역도 잘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을 할 줄 알면 통역도 할 수 있고 통역을 할 줄 알면 번역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을 잘한다고 자동으로 통역을 잘하게 되는 것도, 통역을 잘 한다고 자동으로 번역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번역에서 요구되는 기술과 통역에서 요구되는 기술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글쓰기다. 한 번 쓴 글은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한다. 한편, 통역은 녹음을 하지 않는 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 않는다. 통역은 꼼꼼한 글쓰기 능력을 요하지 않는 대신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다. 화자의 말을 전부 통역하기보다는 핵심을 잘 잡아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번역에서 누락이 생기면 큰 문제가 된다. 누락도 오역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번역은 글을 잘 써야 하고 통역은 말을 잘해야 한다.
번역과 통역은 완전히 다른 분야다. 번역을 잘 하는 사람이 통역에 요구되는 기술을 계속해서 연마할 경우 통역도 잘할 수 있고, 반대로 통역을 잘 하는 사람이 번역에 요구되는 기술을 계속해서 향상할 경우 번역도 잘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를 잘 한다고 저절로 다른 한 가지를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판권으로 돈 좀 벌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든지, “번역료 좀 팍팍 올려달라고 얘기해”라고 조언한다든지. 보통 번역가는 매절로 번역료를 받는다. 다시 말해 번역한 양만큼 돈을 받는다. 저작권으로 돈을 벌려면 ‘인세’로 지급받아야 하는데 책이 팔리지 않으면 번역한 만큼의 대가도 지급받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가는 보통 안정적인 매절을 택한다. 그러다 갑자기 번역한 책이 대박 나면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책이 잘 팔릴지 번역가는 알 수 없다. 책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마케팅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대박이 나는 책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독서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 대박을 꿈꾸며 번역료를 인세로 지급받을 번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잘 팔릴 것 같은 책은 출판사 쪽에서 당연히 매절로만 지급하려고 한다. 번역가가 책을 번역해서 떼돈을 벌기가 쉽지 않은 구조인 거다.
번역가들이 받는 번역료는 물가 상승률과 관계없이 꾸준하거나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기에 번역가가 번역료를 올려달라고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 번역료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력을 향상하는 것뿐이다. 그조차 5년에 많아봤자 매 당 500원 정도 올라가는 업계이기에 내 몸값이 ‘팍팍’ 오르기를 바란다면 이 바닥을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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