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번역가의 불안감
본문 바로가기
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출판번역가의 불안감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14.
반응형
SMALL

 

번역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후 온전히 나의 손으로만 결과물을 완성한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획서를 하나 작성하는 데에도 온갖 사람의 의견이 들어가야 했고 문구 하나조차 내 마음대로 작성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작성한 기획서가 윗선의 결제를 통과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으며 우여곡절 끝에 진행이 이루어진다 해도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번역가가 된 이후 나는 야근을 한다 해도 회사에서 마지못해 일할 때와는 달리 벅찬 희열을 느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오롯이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할 수 있다는 짜릿함 때문에 나는 상대적인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계속해서 번역이라는 걸 하고 있다.

 

 

맨땅에 헤딩한 것치고 초반 성적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인연을 맺은 에이전시는 나의 전공을 감안한 건지 계속해서 건축이나 인테리어 관련 책을 주었다.

 

글보다 그림이 많은 그런 책들은 큰 돈벌이가 되지 않았지만 무사히 다른 세계에 안착한 것에 흥분했던 나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일을 하는 데 있어 재미라는 것이 꾸준히 따라오려면 적당한 자아실현과 적당한 사회적 의미에 적당한 돈벌이가 조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현재 몸값이 과연 맞는 건지, 나의 가치, 일의 가치에 물음표를 띄워보기 시작했다.

 

시간은 많이 투여해야 하는데 그 일로는 합당한 소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만 그 일을 해나갈 수 있다. 그 일에서 재미를 느끼든지, 그 일이 또 다른 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 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러 감각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든지

 

 

억울한 일은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묵묵히 버텼던 어떤 구간을 넘어섰는데도 꽉 막힌 정체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일시적인 달콤함이 아닌  지속적인 재미를 욕망하기 시작했다.

이다혜 기자는 《출근길의 주문》에서 "자기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뛰어난 능력자도 사기꾼도 넘쳐나는 세상에서 언젠가 눈에 띄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방망이 깎는 사람으로 늙어가겠는가?"라고 묻는다.

언제까지고 고상한 척 있을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동아줄 하나 없이 던져진 신세라면 나 자신을 알리는 노력은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력이 직접적인 성과를 낳은 적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내가 뿌려 놓은 씨앗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늘 품고 있다.

 

출판번역가는 이직이랄 것도 포트폴리오랄 것도 없는 데다 늘 '나'라는 최소 단위의 불안을 지고 갈 수밖에 없다.

 

밥벌이가 가져다주는 경제적인 보상과 재미 따위를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긴장감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감각 아닐까.

 

고정적인 직장을 다닌다 해도 그런 고민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닐 테니.

그런 말로 애써 나를 위로하며 오늘도 이 불확실한 미래를 헤처 나가기 위한 나만의 무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나이다. 

반응형
LIST

'번역 Life > 번역가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한 번역가  (0) 2021.10.14
번역가의 공부  (0) 2021.10.14
안정적인 프리랜서가 가능할까  (0) 2021.10.14
내가 출판번역을 고집하는 이유  (1) 2021.10.13
출판번역가의 수입  (0) 2021.10.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