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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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고독한 번역가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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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고독한 직업》을 읽은 적이 있다.

훗날 내 일에 관한 책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고독한 직업에 내가 걸치고 있는 번역가라는 고독한 직업을 겹쳐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정말 고독한 직업이 맞나 의심이 될 만큼 고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혹시나 하고 원제를 찾아봤더니 <영화에 얽힌 X에 대해>라고 한다. 왠지 속은 것 같은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달을 홀로 모니터의 여백과 싸워야 하는 번역은 고독한 작업이다. 편집자의 피드백도 번역이 일단 완료된 후에야 받을 수 있으니 작업 도중에는 그 작품에 대해 누군가와 대등한 입장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없다.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고독한 직업》을 번역한 이지수 번역가의 말처럼 다소 알 수 없는 영화감독의 세계와는 달리 번역가는 정말로 고독한 직업이다.

우선 혼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가끔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담당 편집자와 방향 본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작업에 들어가면 혼자만의 싸움이다.

인맥을 쌓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번역가는 억지로 시키지 않는 한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번역가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건 바로 이 고독함 때문이다.

고독함이란 한 동안 딴지 거는 사람의 방해 없이 일할 수 있는 자유의 또 다른 말이므로.

 

 

번역가라는 직업의 탈을 쓴 지 10년쯤 되니 새로운 애착이 생긴다.

 

멋모르고 도전하던 당시 일단 해보자, 그러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그저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 둘 처리해 나갔었다면 이제 좀 더 멀찍이 떨어져서 새의 눈으로 이 세계를 조금은 내려다보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나.

그러다 보니 이 직업이 지닌 단점보다는 장점에 더 눈이 가고 나에게 부족한 점도 확실히 보인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출연자 오디션에 얽힌 에피소드를 얘기하면서 "탈락한다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모든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고 '퇴짜' 맞을 때면 나의 마음은 여전히 조금 욱신거리곤 하는데, 저런 자세로 임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를 붙들고 갈 수 있는 힘, 고독한 직업을 가진 이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닐까.

 

번역가의 체력 관리나 고독과의 싸움, 문체나 단어 선택에 관한 고심은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로 돌아갈 무심한 것들이라고.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듯, 아무도 안 읽는 책보다는 누군가가 읽고 비판이라도 해주는 책이 낫다.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고독한 번역가도 좋지만 사실 나는 '다가가는 번역가'가 되고 싶다.

 

혼자 골방에 처박혀 지내는 번역가가 아니라 독자와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그런 번역가.

이렇게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출판계의 위기와 맞물린 번역가라는 직업을 이고 가는 사람으로서 나의 개성을 살릴 수 있을 방향을 생각해본다.

 

분위기 잡는 그런 건 다른 번역가들에게 맡기고 나다운 포지션을 잡아봐야지.

고독은 즐길 수 있을 때까지만 '고독'이라 말할 수 있으므로. 우아한 고독 따위는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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