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번역가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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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 되는 법

번역가가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번역가 되는 법)

by 글 쓰는 번역가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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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글을 읽을 때 자신의 맥락 내에서 이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맥락은 해당 글에 대한 배경 지식, 문체의 친숙함 따위가 쌓이고 쌓여 형성된 이해력일 테다. 이 맥락의 다름으로 인해 사람마다 각기 다른 독해가 나오게 된다. 번역 역시 동일한 원문에서도 각기 다른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정영목 번역가는 이를 두고 “인간의 언어는 성기기 때문에 번역의 반은 상상이다.”라고 했다.

 

우리의 생각을 담아내는 언어의 상대적인 빈약성 때문에 저자조차 자신의 생각을 100퍼센트 담아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글에 번역가는 자신만의 해석을 입힌 뒤 또다시 언어라는 성긴 형태 속에 이를 담아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번역가 자신조차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는다.

 

번역가라면 “창조적 읽기로서의 번역”이 지닌 중요성에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깔끔하고 맛깔난 한국어로 잘 번역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번역은 뉘앙스를 살리지도 못하고 때에 따라 오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순한 독해력이 아닌 문맥을 제대로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원서를 많이 읽는 수밖에 없다. 관심 분야의 책뿐만 아니라 난이도가 조금 있는 책도 읽으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줄을 긋거나 필사를 하거나 가만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뇌 안에 기존에 없던 회로가 형성된다. 없었던 길이 생겨나며 사유의 깊이와 함께 창의력이 뻗어나간다.

 

책은 배움의 수단이기도 하다. 앎이 전제되어야 나름의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읽으며 계속해서 정보를 축적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독서가 아니라 관심 분야에서 가지치기를 해 나가는 독서를 권한다. 관심 분야의 책을 읽으며 그 책에서 소개하는 또 다른 책을 찾아 읽어나가는 식이다. 채널 예스에서 소개하는 명사의 서재 코너와 책읽아웃 팟캐스트를 좋아한다. 전자는 좋은 책을 추천받기에 좋고 후자는 혼자 읽은 책을 저자나 다른 이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며 색다른 시각을 얻게 되어 좋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행위”다. 번역은 골방에 틀어박혀 하는 일 같지만 결국 세상에 대해, 저자에 대해, 그리고 저자가 그리는 세상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야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잘 이해하려면 잘 읽어내야 하는 법. 번역가가 능동적인 독서를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중간 안착지로서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번역이라는 세계에 뛰어드는 지금 우리 세대의 번역가가 가장 간과하는 역량이 글쓰기 능력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나 시인의 길을 걸으려다 번역으로 돌아선 과거 세대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능력이 지금 우리 세대에게는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세대는 기능인적인 태도로 번역에 다가가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가라면 단순한 기능인 이상의 역할이 요구되는 순간에 마주할 수밖에 없다. 번역은 저자의 글쓰기를 창의적으로 해석해 나의 글로 표현함으로써 저자의 글과 하나의 관계를 구축해 나아가는 과정이므로 번역가라면 글 쓰는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글을 쓰면 문장력이나 논리력이 향상되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문체라는 것이 확고해진다. 번역가에게 문체는 상당히 중요하다. 대학원 시절 늘 깨지기만 했던 한 번역 수업에서 딱 한 번 긍정적인 코멘트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내 문체가 해당 번역문(잡지에 실린 여행 에세이였다)에 참 잘 어울린다는 피드백이었다. 한 사람의 문체란 그 사람만의 반복적인 어휘 사용이나 언어의 리듬감 따위가 버물려져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이기 때문에 나만의 문체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글을 써보는 수밖에 없다.

 

번역가가 글을 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획서 때문이다. 기획서는 번역가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다. 정체성이 뚜렷한 번역가에게는 주는 일만 받아 하는 것만큼 고역도 없다. 나는 기획서가 나에게 맞지 않는 정체성의 틀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믿는다.

 

기획서를 작성할 때 필요한 기획력과 문장력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쌓인다. 글을 쓰는 사람은 결코 자기 안의 것만 쓰지는 않는다. 다양한 인풋을 소화해내는 과정을 통해 번역가는 새로운 시각과 창의력을 얻게 되고 이로써 다른 번역가와 차별화될 수 있을 만큼 몇 단계 성장을 거듭한다.

 

지금은 번역가의 역할이 과거보다 축소되어 말 그대로 ‘번역’만 하는 젊은 번역가들이 많지만 번역가가 수동적인 기능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본다. 굵직한 에이전시에 채가지 않은 소설이 아직 한 가득이다. 하루치 작업 분량이 당장의 수입과 결부되는 현실에서 가시적인 성과와 연결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역서가 늘어가는 번역가라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어본 번역가라면 결국 기획을 할 수밖에 없다. 별다른 직급이 존재하지 않고 다른 팀원들에게 무임승차할 수도 없는 이 세계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으려면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하물며 그게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글을 써야 하는 이보다 확실한 이유가 어디 있으랴.

 

https://libraryoftranslatorj.tistory.com/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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