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라는 직업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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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 되는 법

번역가라는 직업의 매력

by 글 쓰는 번역가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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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사, 변호사처럼 ‘사’로 끝나는 직업보다 건축가, 소설가처럼 ‘가’로 끝나는 직업에 더 끌리곤 했다. 모두가 최고라 꼽는 직업은 전자겠지만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건 후자라고 생각했다. 최초의 독자가 되는 특혜를 누리는 번역가 역시 후자에 속하는 건 두말할 필요 없다. 화려한 삶은 아닐지라도 매력적인 직업임이 틀림없다.

  

번역은 T형 공부가 필요한 분야다. 깊은 지식도 필요하지만 얇고 폭넓은 지식도 두루두루 필요하다. 관련 지식을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에 따라 번역의 질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외국어만 이해해 번역을 한 사람과 내용까지 이해해 번역을 한 사람의 번역문은 누가 봐도 다르다. 전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번역하기가 수월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난 그 분야만 번역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다른 분야를 공부 안 해도 상관없겠지만 어디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나? 자신의 전공과 동떨어진 분야를 번역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그 분야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번역가라면 평소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어야 할 수밖에. 

 

한 권의 책을 번역하고 나면 대체로 모든 번역가가 생소했던 분야의 준전문가 정도는 된다. 적어도 어디 가서 한 마디 의견을 보탤 정도는 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 속에 남은 정보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번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몰랐을 세상을 알게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번역의 또 다른 매력은 제2의 창작이라는 사실이다. 번역이 창작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번역을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번역은 창작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가는 작가가 쓴 글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옮겨 자신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도 누구의 소설을 어떤 번역가가 번역했는지 관심을 갖는 독자뿐만 아니라 특정 번역가가 번역한 책만 본다는 독자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번역가의 인지도가 그만큼 높아지면서 번역가의 창작 능력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기욤 아폴리네르 시집: 내 사랑의 그림자》를 번역한 성귀수 번역가의 역자 노트를 살펴보자. 

 

“시 번역의 어려움은, 역자가 시를 읽을 뿐 아니라 ‘정말로 시를 써야’ 한다는 점에 있다.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그렇지만,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은 그것을 읽고 이해해서 자율성을 갖춘 작품으로 ‘재창조’하는 과정 모두를 포괄한다. (중략) 제한된 능력이나마 의미의 근접한 전달에 더해, 매 순간 ‘한 편의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

 

 

번역은 원문이 있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다. 하지만 번역이 지닌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을 생각할 때 번역가가 창의력을 발휘하게 되는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가는 원문을 쓴 저자의 생각에 최대한 가닿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를 해석하고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은 번역가마다 다르게 이루어지므로 번역문에는 번역가의 창조력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끝으로 번역은 일감이 줄어들 일이 없다. 국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번역이 필요한 문서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또 한 번 번역과 통역을 비교하게 되는데 번역 시장은 통역 시장에 비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통역은 생각보다 수요가 한정되어 있다. 요새는 어학 능력이 출중한 직원들이 사내에도 많기 때문에 사내 인력으로 통역 수요를 대체하기도 한다. 번역 역시 사내 인력을 쓸 수도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혹은 자체 인력으로 감당하기에 그 양이 많거나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외주를 주는 사례가 많다. 

 

통역가는 단기간 내에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사전에 관련 분야를 공부해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그다지 높은 것도 아니다. 정해진 장소에 가서 통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으며 왕복 차비나 이동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마저도 일이 꾸준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을 때는 통역가조차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다가 통역가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번역가는 본인이 원한다면 말 그대로 눈 감는 날까지 일할 수도 있다. 

 

쓰미 유지가 쓰고 이희재 번역가님이 번역한 《번역사 산책》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번역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독서라면 그 삶을 흡수하여 소화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것은 그 삶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몸뚱이가 솟아오를 때까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옮기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의 삶을 옮기려는 노력. 번역이 그런 일이라면 책에 담긴 하나의 삶을 오롯이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매력은 없을 것이다. 그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 그 삶에 공감하려는 마음은 번역가의 가장 큰 기쁨이자 고난의 원천 아닐까?

 

https://libraryoftranslatorj.tistory.com/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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