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를 꿈꾸는 00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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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 되는 법

번역가를 꿈꾸는 00에게

by 글 쓰는 번역가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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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꿈이라는 여고생의 글을 보았다. 부러웠다. 어린 나이에 그런 꿈을 꾸다니. 내가 서른 즈음에서야 겨우 찾은 꿈을. 허나 그 아이 역시 커가면서 꿈이 열두 번도 더 바뀔 거다. 운이 좋게도 그 아이가 10년 뒤에도 같은 꿈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때 묻고 싶다. 그 꿈이 “아니면 말고”의 세계인지, 꼭 해야 할 일의 세계인지.

 

번역가가 되기로 했다면 한 번쯤은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번역에서 요하는 정신노동의 강도는 상당히 높다. 쉽게 돈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혹은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처럼 안일한 생각에서 시작하기에는 희생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다. 번역에 맞는 적성이나 성격보다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할 만큼의 열망이 나에게 있는지 살펴보는 게 먼저인지도 모른다. 

 

번역에는 사법고시처럼 시험을 봐서 통과해야 하는 과정도 없고 대기업처럼 입사 전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공부를 시작한다고 당장 번역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불명확한 미래가 현실이 되면서 예상치 못한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다. 나의 노력에 비해 적은 돈이 수중에 쥐어질 때면 남들처럼 착실하게 회사나 다니는 게 날지도 몰랐다는 후회와 실망감이 밀려올 수도 있다. 아직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이 길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회사에서는 1시간 동안 정신없이 일하든, 잠시 멍을 때리거나 동료와 잡담을 나누든 정해진 월급이 나온다. 회사에 내 시간을 헌납하는 대신 그 대가로 정해진 만큼의 보수를 받는 거다. 하지만 번역에서는 내가 한 딱 그만큼만 정직하게 돈을 받는다. 1시간 동안 수다를 떨면 그 시간만큼 돈을 못 버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꺼려지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치사하리만치 정직하게 자 당으로까지 번역료를 계산하는 세계다. 

 

번역은 나 혼자 하는 일이다. 아주 외로운 작업이다. 모르는 표현이 나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있겠지만 완성을 해야 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은 묻어갈 수 있는 회사생활과는 달리 번역가는 아주 짧은 번역문일지라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번역가에게 필요한 건 일종의 장인정신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번역가의 길은 결코 꽃길이 아니기에 무턱대고 내디딜 게 아니라 나의 열망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시험대에 여러 번 올려본 뒤 직장에서 나왔다. 퇴근 후와 주말을 이용해 공부를 하고 부족한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를 본 뒤 결정을 내렸다.

 

번역을 하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간절한지는 나 자신만 알 수 있다. 직장 생활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번역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피상적인 열망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렇게 번역을 시작한다면 아무래도 가다 멈춰 설 확률이 높다. 하지만 무시하려고 해도, 억누르려고 해도 열망이 계속해서 고개를 든다면 조금 더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일 때다. 열망에 기회를 줘야 하는 거다. 

 

열망이 자꾸 손짓하는 이 단계는 미성숙한 열망이다. 이 열망이 더욱 깊은 열망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열망에 물을 줘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시켜서 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장 마지막 단계, 잘 익은 열망에까지 도달해야만 비로소 번역을 시작해야 한다. 

번역을 향한 나의 열망을 확인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존에 하는 일을 그만두기 전에 번역 세계에 발을 살짝 담가 보는 것이다. 직접 일을 해보면 좋겠지만 불가능할 경우 지인이나 다른 번역가의 경험을 통해 번역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봐도 좋다.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번역 수업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 공부가 재미있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그 수업이 기다려지며 이 일을 평생 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는 과감히 번역의 세계에 뛰어들어도 좋다. 다만 이 기쁨이 일시적인 것은 아닌지, 평생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잘 익은 열망을 터뜨려보고자 번역에 뛰어든 사람들이 꽤 있다. 언젠가 번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간직한 그들은  그 때를 위해 지금의 희생을 감내한다고 생각한다.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저 버티기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성취를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를 그리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오늘의 나를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니까.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흘려보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기억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일에는 저마다 다른 속도의 시간이 필요했단 걸 알겠다. 이제는 그 시간들도 꽤 괜찮았던 시간으로 품을 수 있다. 

 

그러니 당신이 어디에 있든 일단은 오늘을 잘 살자. 총천연색의 하루하루가 모여 어느 날 나만의 이력을 지닌 번역가가 되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번역가를 꿈꾸는 소녀의 꿈이 10년 후에도 건재하기를 바란다. 

 

https://libraryoftranslatorj.tistory.com/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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