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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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 되는 법

번역의 기쁨과 슬픔

by 글 쓰는 번역가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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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 뜸 들인 뒤 결제 버튼을 눌렀다. 아이의 여름 캠프 이야기다. 너무 비싸 매 년 미루고만 있던 걸 이번에는 해보기로 했다. 나의 한 달 벌이를 전부 털어 넣어야 했지만, 일 안 하고 애랑 놀아주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분석도 해봤지만 돈은 증발하더라도 5주라는 시간 동안 나의 제정신과 또 한 권의 역서는 남겠지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랑 놀아주는 것보다 번역하는 게 더 편해서였다.

 

번역은 예술의 영역인가, 기술의 영역인가. 대중에게 어떠한 반응을 끌어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예술가의 영역에 속하나 대략 얼마의 수입이 수중에 들어올지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번역할 책의 분량과 자간, 여백 따위를 보면 한글로 옮겼을 때 대충 원고지 몇 매가 나올지 가늠이 된다. 인세가 아닌 매절로 받는다고 쳤을 때 한 달에 벌 수 있는 금액이 곧바로 나오는 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루에 번역하는 시간을 늘리면 전체 번역일 수가 줄고 게으름을 피워 조금만 번역할 경우 몇 달이 넘도록 같은 책을 번역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하루에 번역하는 분량을 두세 페이지만 늘려도 한 달이면 꽤 극적인 효과가 발생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차곡차곡 추가한 두세 페이지는 이자는 가져다주지 않지만 번역일 수 감량이라는 만기 적금보다도 뿌듯한 결과를 물어다 준다.

 

번역은 특정한 양의 시간을 투입해야만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일이다. 호박을 넣고 반죽을 만들면 호박색 파스타 면이 나오는 정직함과도 같다. 내가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 적나라한 정직함에 여지없이 눌려버릴 때도 있지만(놀 때는 전혀 돈이 들어오지 않으며 보너스 따위는 없다) 다른 곳으로 새는 에너지 없이 나 하나만 잘 끌고 가면 기필코 완성되는 일이다.

 

한 권의 책을 중반쯤 번역할 때가 되면 샘플 번역을 했을 때의 마음이 시들해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출판사나 에이전시에서는 당연히 샘플 번역의 퀄리티를 기대한다. 번역가는 번역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퀄리티를 한결같이 유지하지는 못한다. 똥 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거다. 그러니 억지로 느슨해진 세포를 바짝 조여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 세계에도 명암이 존재한다. 우선 암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일이 없을 때면 불안해진다. 프리랜서에게 한가함은 자유가 아니다. 공백은 휴식이 아니다. 불안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감히 육아를 권한다. 체력이 달리는 하루에는 불안할 마음이 뿌리내릴 틈이 없다.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하는 엄마가 되면 ‘과일을 썰어줄 때에는 최대한 잘게 썰어서 나의 시간을 번다(최근에는 잘 찍히지 않는 포크를 주면 뭐든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그걸 찍는 동안 시간을 더 벌 수 있다는 새로운 팁도 얻게 되었다)’ 같은 생활 팁도 무한 장착하게 된다. 조각 시간도 이어 붙여 쓸 줄 알게 되며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책이나 번역문을 읽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게 된다.

 

또 다른 암으로는 외서 기획서나 번역가 지원 거절 메일을 받을 때 느끼는 우울함도 있다. 우울함의 명도는 때에 따라 짙어지거나 옅어지는데 너무 짙어질 때에는 잠시 쉬는 편이 좋다. 안 그러면 나의 기획력이 제로라는 생각과 번역가로서의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그럴 때면 외서 기획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밥벌이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상황을 애써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이제 명에 대해 얘기해 보자.

책 번역은 다른 번역과는 달리 번역자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길다. 물론 두세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릴 때도 있다. 이제 이 일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간다. 그러다 보면 계절이 가는 것도 잊고 이번 마감, 다음 마감만 달력에 빼곡히 적어둔 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도 한다. 신랑의 미국 휴일과는 관계없이 나의 업무 일정은 흘러간다. 프리랜서는 나 스스로 휴일을 주기 전에는 휴일이 없다. 휴가까지 계산해서 계약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잘 조율해야 한다. 명에 대해 얘기하려던 건데 어찌 암에 대해 얘기한 것만 같다.

 

편집자가 낮에는 자신이 애호하지 않는 분야의 책을 만들고 홍보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좋아하는 책들을 탐독하듯 번역가 역시 낮에는 돈 되는 책을 번역하고 저녁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주워 드는 사람이 많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되었으나 그러지 못해 차선으로 이 직업을 선택한 이들이 있기도 하다는 점 역시 편집자와 비슷하다. 이건 명인가 암인가. 잘 모르겠다.

 

이건 확실한 명인데 프리랜서 번역가는 낮에도 마음만 먹으면 산책할 수 있고 계절이 흘러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걸 요새 반강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갔다 하느라 하루에 50분씩 무조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봄은 왜 사라진 거냐고 왜 겨울 다음에 바로 여름이냐고 늘 씩씩댔는데 알고 보니 지금이 바로 봄이었다. 그 귀한 사실은 물론, 봄이 생각보다 우리 곁에 오래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산책길 덕분이다.

 

100세 시대라지만 내가 100세까지 살 수 있을지, 그때가 되면 다른 직업으로 갈아타야 하는 건 아닌지, 새로운 기술을 하나 배워둬야 할지 가끔 진지하게 고민한다. 내가 갖고 있는 게 고작 10여 년의 경력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지 싶다. 이 분야에서 조금씩 외연을 넓혀볼 여지가 많다는 뜻이다. 전혀 다른 분야에 뛰어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20대까지 기출문제 정답 같은 삶을 살아온 내가 모처럼 다른 방향으로 내달려 선택한 두 번째 직업 이외에 무엇을 더해볼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더 나은 번역가가 되려면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변명해보자면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치 번역 분량을 소화하기에 급급해 공부할 시간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저 책을 읽는 동안 게으르게 단어를 주우며 한국어 실력에 살이 붙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글도 쓴다. 나처럼 휘청이고 줏대 없는 사람에게는 글쓰기가 좋은 처방이다. 글로 써 보면 입으로 내뱉을 때에도 나의 생각에 확신이 생긴다. 자신감이 붙는다. 번역에도 당연히 도움이 된다.

 

설렁설렁 운영하고 있는 내 블로그에는 잊을 만하면 어디에선가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나타나 댓글을 남긴다. 차곡차곡 적어 내려간 그 글들에는 어떤 떨림과 애틋함이 녹아 있다.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번역가가 되고 싶은가. 나는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가 되고 싶다. 차라리 설거지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든가, 양치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번역가가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가 되고 싶다니. 하지만 번역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정말 번역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 하려면 그래야 한다. 이건 생각보다 오랜 생각 끝에 건진 답이다. 그러니 믿어도 좋다. 나는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가 되겠다.

 

처음에 에이전시와 일할 때 ‘내가 이 정도 돈이나 벌려고 이 길을 선택했나?’하는 생각에 우울한 적이 있다. ‘다른 동기들처럼 취업을 해야 하나.’ 생각도 잠깐 했다. 하지만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직장 생활이 싫어 이 길을 택했는데 다시 그곳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흔들리던 날 붙잡아주었던 건 목표였다. ‘반드시 출판 번역가로 자리 잡자.’라는 목표였다. 그보다 작은 목표도 하나 더 세웠는데,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한 번역으로 최대한 돈을 벌자.’였다.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수중에 들어오는 일은 일단 다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일지언정 안 버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그렇게 큰 욕심 없이 한 권, 두 권 번역하다 보니 역서가 쌓여갔고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칠흑같이 어둡던 터널의 끝이 보였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물론 실력도 쌓였다.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주위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도 긍정적인 말은 별로 없었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이대로 쭉 가면 언젠가는 길이 나올 것 같았다. 꾸준히 가면 느리더라도 목적지에 다다를 텐데 괜히 샛길로 새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당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표가 있으면 뚝심이 생긴다. 언젠가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 살게 될 거라 믿게 된다. 주위에서 아무리 흔들어도 혹은 내가 흔들려도 내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

 

이 길이 맞나, 스스로 의구심이 들 걸랑 처음에 내가 이 길을 선택했을 때 세운 목표를 다시 들여다보기 바란다. 목표는 나에게 힘을 준다. 이 목표를 세웠을 때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아니 그때보다 목표에 더 가까워졌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고. 그렇게 목표를 점검하더라도 내일이 되면 또다시 흔들릴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러면 내일 또다시 내가 세웠던 목표를 꺼내 들여다보면 된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면 된다. 그러면 된다.

 

혜성처럼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배우나 가수도 알고 보면 10년 동안 연습생 시절과 무명 시절을 거친 이들이 많다. 그들 역시 흔들림의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절을 노력과 연습만으로 버텼을 것이다. 일단 조명을 받고 나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승승장구한다. 그간의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 누구보다도 반짝인다.

 

나 역시 이제 겨우 목표를 조금 달성했을 뿐이다.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아직까지도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활에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하려고 이 길을 택한 것이 아니기에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마음을 조금 붕 띄워 본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왔다고. 이만큼도 오지 못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라고. 가슴 속에 씨앗 하나만 품고 있던 때에 비해 이제는 줄기도 자라고 열매도 맺지 않았냐고.

 

어떤 진로를 택하든 인생은 고민의 연속이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난 만족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번역을 하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어느덧 새로운 길을 밟은 횟수가 회사를 다녔던 횟수의 두 배가 넘었다. 역서가 100권, 200권이 넘어가면 권태기도 올 거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나를 뒤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우선은 지금의 내 자리를 오롯이 즐기려 한다.

 

내가 13년 전에 고민하고 새로운 문 앞에서 망설였던 것처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고민을 주렁주렁 매단 채 허우적대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믿고 문 밖으로 나가보면 어떨지. 지금은 희미해 보일 테지만 저기 어딘가에 또 다른 모양의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가 봐도 좋겠다.

 

https://libraryoftranslatorj.tistory.com/212

 

밥벌이로서의 번역(번역가의 수입)

나에게 책을 번역하는 일은 익숙한 세상이 조금씩 물러나고 낯선 세상이 천천히 스며드는 경험이었다. 조금씩 물러날 뿐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서 남들에겐 평범하지만 나에겐 유일무이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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