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을 번역하는 일은 익숙한 세상이 조금씩 물러나고 낯선 세상이 천천히 스며드는 경험이었다. 조금씩 물러날 뿐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서 남들에겐 평범하지만 나에겐 유일무이했던 5년간의 직장 생활은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를 찾아온다. 퇴사했다가 개인 사정으로 다시 입사해 멋쩍게 사람들과 인사 나누는 꿈, 회사에 늦었다며 헐레벌떡 준비하는 꿈을 나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꾼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내 삶의 한 시절은 더디게 물러나는 중이다.
2011년 여름, 대학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맞이한 방학에 처음으로 책이란 걸 번역해 돈을 벌었다. 젊지 않은 혹은 그렇다고 생각한 나이에 새로운 세상에 뛰어든 터라 이 바닥에서 내가 번역으로 정말 돈을 벌 수 있을지 무진장 궁금했다. 얼마를 받는 게 적정한 건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첫 책을 덜컥 받은 나는 며칠 후 에이전시 사장의 부름을 받고 사무실에 찾아갔다.
지금은 위치조차 생각나지 않는 그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서른 살의 나는 바짝 얼어 있었다. 모든 시작이 그렇듯 나는 설렘과 두려움을 반반씩 얹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사장을 찾아갔고 나를 본 그는 다짜고짜 나의 번역 원고가 담긴 파일을 열어 교정을 보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지.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야.”
그건 좋다 혹은 싫다는 감정이 수반되지 않은 그야말로 날 것의 경험이었다. 한 학기 수업만으로 내가 번역가가 되었을 리 만무했고 나는 그가 한 말을 반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다 알아들은 척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정해서 다시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곳을 나섰다.
그 후로도 몇 권의 책을 더 준 거 봐서 나는 생각보다 그의 강의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나 보다. 비로소 회사를 그만두기 전 막연하게나마 그려봤던 나의 미래가 조금은 또렷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책을 번역해 돈을 벌 수 있었고 그 책은 나의 이름이 찍혀서 몇 달 후 출간되기까지 했다! 그 책을 처음 서점에서 보았던 마약과도 같은 강렬한 기억은 나를 다음 책, 또 다른 책으로 꾸역꾸역 끌고 갔고 10년 넘게 그 마약 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그놈의 돈이었다. 시간당 계산해 보니 최저시급의 반도 되지 않았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돈으로 반찬거리도 사고 커피도 사 마시고 나중에 아이들 장난감도 사줘야 했다. 한숨이 나왔지만 아직 학생이니 그럴 거라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실력이 쌓이고 경력이 쌓이면 번역료도 오를 테니 지금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자고. 그때만 해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 사장에게 몇 달 후 번역료를 떼일 줄은. 그 후로 여러 에이전시와 출판사를 전전한 끝에야 비로소 안정 비스므리한 게 찾아왔지만 그 안정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 같은 거라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이 쓴 《읽는 직업》에서 “그들은 가난하다”라는 꼭지를 읽을 때면 그늘이 나를 덮치는 기분이다. 번역가 H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돈이 되기 때문에” 트렌드를 좇고 겉치레에 능한 책들을 주로 번역한다. 자기 관심사인 철학책을 번역하면 금전상의 손해를 입기에 그가 걸어온 행로에는 “뚜렷한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윳값과 기저귀 값을 사려면 하루에 몇 장을 번역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10년이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인 번역료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가정을 책임지려고 번역가들은 저마다 발버둥이다. 말미에 등장하는 번역가 P는 번역을 하면서 밤에는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면서 계란찜은 눌어붙어서 설거지하기 힘드니까 지인들에게 식당에 가면 계란찜을 시키지 말라고 당부한다. 여기까지 읽는데 눈물이 차오른다.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정말 힘들고 눈물겨운 일이다. 가장으로서 번역을 하는 이들이 이런저런 다른 일들도 함께 하는 이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은 아니지만 늘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지 궁리한다. 그렇다고 돈을 모든 것의 잣대로 삼고 싶지는 않다. 돈이 된다면야 이것저것 해보고 싶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기준 하나만은 지키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줏대 없이 휘청거릴 수 있다는 걸 돈이 된다고 웹소설까지 기웃거려본 결과 깨달았다.
갈팡질팡하는 동안 내가 살펴본 선택지는 다양했다. 통번역대학원 입시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다시 빡세게 공부를 해서 뉴욕에서 사법 통역사로 활동하는 것부터 취미를 살려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처럼 뭔가를 만들어 파는 일까지.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사이드 프로젝트 100》이라는 책을 읽다가 귀뚜라미를 파는 사람을 보며 소오름이 돋아 그만 책장을 덮고 말았지만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괜히 한 눈 팔지 말고 번역이라는 내 일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걸 나도 안다. 그래서 늘 갈등한다. 내가 하고 싶은 책과 돈이 되는 책 사이에서. 들여오고 싶은 책과 잘 팔릴 것 같은 책 사이에서 고민하는 동네 책방 주인처럼. 에이전시에서 소설을 의뢰하면 하고 싶지만 2~30퍼센트의 수수료를 생각하며 결국 빨리 번역할 수 있는 자기 계발서만 승낙한다. 일이 꾸준히 있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시간에 얼마를 벌었느냐다. 작년에 에이전시를 통해 내 관심 분야의 책을 세 권 연속 번역했는데 내 손에 들어온 번역료는 출판사와 책 한 권 계약했을 때의 번역료에 불과했다. 그 돈이 나에게 전달된 건 번역문을 넘긴 지 3개월 후였으니 내가 가장이었다면 나는 기저귀 값도 우윳값도 벌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이 되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 역시 내가 번역한 역서들만 펼쳐놓고 보면 “뚜렷한 방향성” 같은 건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그야말로 돈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번역했던 터라 자기 계발서, 경제경영서, 아동서, 역사, 철학, 심리, 건축 및 인테리어, 소설 등 가히 다양하다. 생계형 번역가에게 돈은 절대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가난한 번역가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면 절대적인 번역료가 앞으로도 절대로 오르지 않을 것만 같다.
어려운 책은 번역료를 조금 더 주면 어떠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려운 책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며 또 그 경계에 있는 책들을 두고 얼마나 많은 논쟁이 벌어질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렇게 되면 쉬운 책을 번역해 시간 당 번역료를 높이려는 꼼수조차 부리지 못하니 번역가들의 숨통을 더욱 옥죄는 해결책이 되어버릴 소지도 있다.
출판사와 첫 거래를 할 때 나는 매당 2,500원을 받았다. 아무도 내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 또한 주위에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그게 적정한 번역료인지 판단할 눈이 없었다. 그전까지 에이전시와의 거래가 전부였던 나는 에이전시에서 얼마를 가져가는지 몰랐고 출판사와 거래할 때 나의 몸값이 얼마인지 감조차 없었다. 훗날 거래하게 된 에이전시에서 수수료를 투명하게 공개한 것과는 달리 그 에이전시와의 거래에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훗날 나는 초보 번역가에게 대체로 3,500원이라는 번역료를 지급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다행히 모든 초보 번역가가 그런 황금길을 밟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유명한 H번역가도 처음에는 2,500원으로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의 형편없었을 실력에도 2,500원을 준 출판사 사장님께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하지만 여기에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었으니 에이전시와 처음 거래할 때에는 이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번역료를 받고 일했으며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일했다는 거다).
5년 후쯤에는 시장의 섭리에 따라, 또 그래도 될 것 같아 3,000원으로 슬그머니 올렸다. 시장에서 받아들여진 걸 보아 적당한 몸값이었나 보다. 새로운 출판사와 거래할 때에는 시작가가 상당히 중요하다. 훗날 거래가 계속 이어진다 하더라도 섣불리 번역료를 올려달라고 요청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적정 번역료에서 너무 깍지 않을 것을 권한다.
지금쯤 그냥 내 마음대로 올리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내 몸값은 내가 정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시장에서 받아주는지 문제다. 출판사에서 내 몸값보다 낮은 번역료를 제안했는데도 수많은 지원자가 몰리면 우리는 기세등등하게 올렸던 번역료를 멋쩍게 다시 낮춰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수요와 공급의 문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거스르려면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특장점을 길러 그거 하면 나라는 번역가가 떠오르게 만드는 거다. 말이 쉽지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업계에서 나라는 번역가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몸값을 높이려면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5년이 지나면 또 500원 올리지 뭐, 라며 안이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500원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시간이 아니라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의 몸값보다 낮은 번역료를 제시하려거나 내가 부른 번역료보다 낮게 제시하는 곳이라면 번역의 질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소중히 여기는 출판사와 일하고 싶은 건 모든 번역가의 공통된 마음 아닐까. 물론 가끔 내가 이렇게 불렀는데 저 쪽에서 곧바로 수긍할 경우 더 높게 부를 걸 후회하기도 하지만. 눈치싸움은 끝이 없다.
나 같은 번역가는 세고 셌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우선 마감부터 잘 지키자. 나는 애초에 마감을 넉넉히 잡고 일하는 편인데 그래서 예정 마감일보다 일찍 끝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대충 번역한 느낌을 줄까 봐 일부러 마감 때까지 기다렸다가 임박할 때 주기도 한다. 다른 번역가들도 그럴까 가끔 궁금하다.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면 번역료가 오를까. 백두리 그림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려면 많이 그려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작할 때에는 누구에게나 내가 없다고. 번역도 그렇다. 처음 몇 권 번역할 때는 원문을 옮기는 것만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가 번역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바라볼 눈도 없는 마당에 문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역서가 쌓이고 문장을 매만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 문체란 게 쌓인다. 그리고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들도 생긴다. 번역가는 내 문체를 내세우기보다는 작가의 문체를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지만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 가운데에는 번역가와의 결이 중요한 책도 있다. 분명 어느 시점에는 나라는 사람의 글을 보고 그 글에 맞는 책을 들고 나를 찾아오는 클라이언트가 생긴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나의 몸값을 올리도록 하자. 낮은 번역료를 제시하는 출판사의 제안에 닥터 피시처럼 몰려드는 건 그들만 배 불리는 일이다. 참고로 몸값을 올리기 가장 적정한 시기는 새로운 출판사와 계약할 때다. 한 번 계약한 출판사와의 거래에서 갑자기 번역료를 올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새로운 출판사와 계약할 때 처음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적정한 번역료를 당당하게 요구하기 바란다. 그리고 샘플 번역에 공을 들여 상대가 믿을 만한 번역가임을 실력으로 보여주자.
나는 내가 번역한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도 좋고 출판사에서 번역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 것도 좋다. 하지만 번역가로서 나에게 일어날 가장 좋은 일은 누가 뭐래도 번역료가 오르는 일이다. 번역하다가 달달한 디저트라 생각날 때 돈 생각 없이 마음껏 집어 들 수 있으면 좋겠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통장 잔고를 생각하지 않고 비행기 표를 끊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전자는 잘 모르겠지만 후자는 진짜 부자만 할 수 있는 일 같다. 아무래도 번역가가 꾸기에는 너무 높은 꿈인가.
번역가가 주인공인 드라마까지 나오는 마당에 이 직업의 대우도 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이상적인 소리를 해보지만 쥐꼬리보다도 적은 번역료를 받고도 책을 번역하려는 사람들이 자꾸 어딘가에서 나오는 한 번역료는 오르지 않을 것이다. 잔인하지만 시장의 논리가 그렇다. 그렇담 우리는 서로의 가난을 위로하며 서로의 역서가 출간될 때마다 박수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일개 번역가 한 명이 거대한 시장을 움직일 힘은 없겠지만 언젠가 ‘을’의 연대가 가능한 날이 오지 않을까. 번역가가 ‘선생님’ 소리를 듣는 또 다른 호구에 머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https://libraryoftranslatorj.tistory.com/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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