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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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 되는 법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

by 글 쓰는 번역가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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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번역료가 입금될 때와 새로운 번역의뢰가 들어올 때가 아닐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새로운 책을 의뢰한다는 메일이 와 있으면 나의 하루는 대체로 기분 좋게 시작된다. 번역 마감 날짜를 다이어리에 표시하며 앞으로 몇 개월의 일정을 가늠해보는 시간, 번역에 들어가기 전에 갖는 이 같은 예열 시간이 번역가에게는 가장 황홀한 시간일 터. 막상 번역에 들어가면 활자로 표현된 생각의 근원을 찾아 나의 언어를 입히느라 정신이 없을 것을 알기에 나는 이 시간을 되도록 충분히 음미하려고 한다.

 

번역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가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일단 의뢰가 들어온 책을 차분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다. 내 방식대로 책을 느껴보는 과정이자 어떠한 방향으로, 어떠한 문체로 풀어갈지 찬찬히 생각해 보는 단계이다.

 

검토했을 때에는 나와 잘 맞을 것 같아 진행하겠다고 했는데 이 단계에서 실망할 때도 있다. 번역 의뢰가 들어온 책을 전부 읽어볼 수는 없다. 대략 한두 챕터만 보고 분위기를 파악하기 마련인데 그러다 보면 막상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전개에 마주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못 하겠다고 물릴 수도 없는 터, 나와 맞든 안 맞든 안고 가야 하는 것도 번역가의 몫이다.

 

책을 읽지 않고 급한 마음에 무작정 번역부터 할 때도 있는데 그렇게 시작해서 결과가 좋은 적이 없었다. 물론 자기계발서류의 평범한 전개는 끝까지 읽지 않고 시작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스릴러 소설가 중에는 간혹 반전의 묘미를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끝까지 읽지 않고 번역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초 호러 소설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결말이 궁금해 마지막 장을 먼저 펼쳐본 사람이다. 번역가마다 일하는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다.

 

문학 작품의 경우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번역에 앞서 여러 번 읽기도 한다. 이 과정을 소홀히 했다가는 번역을 시작한 후 문맥이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울 수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전반적인 내용을 머릿속에 그려 놓고 출발하는 편이 좋다.

 

김화영 번역가는 “번역을 하기 전에 텍스트 자체를 충분히 즐기고 이해하는 과정이 번역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떤 책이 정독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가? 항상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번역에 앞서 그 텍스트의 해석과 이해를 위하여 그 책이나 작가에 관한 연구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했다.

 

번역가들이 번역에 앞서 저자의 인터뷰가 담긴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관련 자료를 검색하는 이유다. 작가나 책의 배경, 전문 용어나 지식 등은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를 높여준다. 익숙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이나 전문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책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오역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정말 중요하다.

 

 

워밍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번역에 들어간다. 우선 영어라는 출발어를 한글이라는 도착어로 옮기는, 즉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다. 누락되는 부분이 없도록 다소 어색하더라도 일단은 최대한 모든 것을 살려 번역한다. 이 과정은 번역가마다 다른데 처음부터 최대한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원문을 최대한 살리는 사람도 있다.

 

이와 관련해 다시 한 번 김화영 번역가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28년 만에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1. 오늘의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과 단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했다. 가장 단순한 것이 항상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므로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2.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가능한 한 피하고 원문의 탈색된 문체를 그대로 유지, 표현하고자 했다.

3. 카뮈의 원문이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는 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관계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대한 해석을 임의로 추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처럼 나만의 원칙을 세워 놓고 번역을 하면 일관적인 번역 흐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간혹 출판사에서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때도 있는데 이는 책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요구 사항이 반영되었는지 확인 차 방향본을 공유하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해진 문장은 일단 붉은색으로 표시해 놓은 뒤 나중에 한꺼번에 확인한다. 번역을 하다 보면 가속도가 붙는데 특정 문장 하나로 속도가 늦춰지면 전체적인 흐름이 끊기고 말기 때문이다. 뒷부분을 번역하다 보면 앞에 어색했던 부분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감이 오기도 한다.

 

검색을 통해서도 뜻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역시 붉은색으로 표시를 해둔다.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읽어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되기도 하며 뒷부분을 읽은 과정에서 뜻이 명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문장을 다시 살펴보면 잘못 읽는 바람에 오역을 했거나 논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부분도 파악이 된다.

 

1차 번역을 마친 뒤에는 몇 번이 될지 모르는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원문을 모르는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매끄러운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논리도 보다 명확하게 살려야 한다. 이를 위해 문장의 순서를 바꾸거나 원문의 구조와는 다르게 번역하기도 하며 긴 문장을 쪼개기도 한다.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한 어색한 표현을 잡아내기 위해 문장 고치기 책을 참고삼아 문장을 다듬기도 한다. 하지만 원문을 아는 번역가 입장에서는 원문에 매이기 쉽다. 번역문을 몇 번이고 수정해도 어색한 부분을 잡아내지 못하기도 한다.

 

나 또한 이런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번역문을 ‘묵히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이유다. 완성본이라고 생각할 만큼 가다듬은 다음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 다시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최종 원고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어색한 표현들이 눈에 많이 띈다. 다시 원문을 확인해 보면 처음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묘한 차이로 오역한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적절한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산책을 하거나 설거지나 청소 같은 육체노동을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꽤 괜찮은 표현이 떠오른다. 책상 앞에 앉아 번역문을 붙들고 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단어가 머리 좀 식힐 겸 청소를 한다든지 요가를 한다든지 하는 순간 번뜩 떠오르는 거다. 우리의 뇌가 무의식 속에 고민거리를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하니 이 현상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탈고를 마친 번역본은 편집자의 손을 거쳐 다시 한 번 편집이 된다. 편집자는 어색한 부분을 번역자에게 다시 수정해 달라고 의뢰하거나 자체 수정을 한 뒤 번역자에게 확인해달라고 요청한다. 경우에 따라 역자교가 몇 차례나 이어지기도 한다.  

 

여러 번의 수정 과정을 거친 뒤 최종 번역문이 완성되면 이 원고는 한 권의 책으로 출간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책의 분량과 성격, 어떤 출판사나 에이전시와 진행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번역가는 시간을 많이 확보하려고 하지만 번역을 의뢰한 쪽에서는 빨리 번역을 마쳐주기를 원한다.

 

‘묵히는’ 과정을 거치려면 책 한 권 당 최소 2~3달은 소요되지만 에이전시를 통해 진행할 경우 짧게는 3주, 길면 1달 반 정도의 시간을 두고 번역 의뢰가 들어온다. 돈벌이가 별로 되지 않는 책 한 권을 3달 동안 붙잡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제대로 된 번역문을 완성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감에 쫓겨서 급하게 완성시킨 번역문보다는 시간을 두고 꼼꼼히 완성시킨 번역문의 질이 당연히 더 좋은 법이다.

 

 책 한 권을 번역한 뒤에는 가급적 또 새로운 책을 번역하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머리를 식히려고 한다. 번역해야 하는 책이 밀려 있는 상황이라면 여유를 부릴 수 없겠지만 새로운 책은 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하기에 머리를 비우는 과정도 중요하다. 새로운 책을 맡는 것 자체만으로 번역가에게는 환기가 되기도 한다. 쉬고 싶은 마음, 새로운 책을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배우나 작가도 한 작품을 마친 뒤에는 여행을 떠나거나 방송 출연을 자제하는 등 휴식을 취한다. 번역가 역시 책 한 권을 번역하고 나면 때에 따라 진이 다 빠지기도 한다. 내용이 어렵거나 분량이 지나치게 많은 책을 번역한 뒤에는 특히 그러하다. 그럴 때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번역하는 책에 지장을 줄 수 있다. 좋아하는 영화나 책을 보고 친구를 만나는 등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필요한 이유다.

 

나 같은 생계형 번역가는 (일이 끝이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이러한 과정을 1년에 최소한 6번은 거친다. 누군가의 눈에는 지루해보일 수 있지만 “발화되기를 기다리는 그 ‘무엇’을 받아들이고 환영할 수 있게 두 번째 언어를 설득하는(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일은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책을 번역하는 이들이 이 세계에 발목 잡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이 지루해 보이는 과정을 전혀 지루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 아닐까. 어떤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그게 정상일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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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냐, 취업이냐

‘번역가’하면 대부분 프리랜서를 생각하지만 취업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기술번역 회사는 물론 로펌이나 법제원 등 법률 관련 분야에서 일하거나 삼성, LG, 포스코 등 사기업에서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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