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나 비가 오나, 피곤하나 아프거나 할 때에도 습관처럼 번역을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번역가 되는 법을 찾아 헤매던 날들을 생각하면 멀리도 왔다 싶다.
많은 이들이 애타게 찾는 ‘번역가 되는 법’은 정확히 말하면 번역가 입문 방법일 것이다.
통번역 대학원에 들어가거나 자격증을 따거나(그런 게 있다면) 아카데미에 등록하거나 등등.
정해진 경로가 명확하지도, 한 가지 방법으로 귀결되지도 않는 이 세계에서 대다수의 번역가 지망생이 번역가 입문 방법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진짜 번역가 되는 법은 그런 표면적인 의미가 아닐 터다. 아카데미나 대학원을 졸업해 에이전시나 출판사를 통해 일을 받는다, 라는 방법론인 ‘번역가 되기’ 말고 번역가로서의 자질을 따져보고 어떠한 자세로 번역을 할지, 어떠한 번역가가 될지 따위의 고차원적인 고민을 해보는 것, 이것이 진짜 번역가 되는 법일 거다.
존 버거는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번역가는 원 텍스트를 읽고 또 읽으며 그것을 뚫고 나가, 그 텍스트를 낳은 비전이나 경험에 가 닿으려 애쓴다. 그런 다음엔 거기서 찾은 것을 모으고, 거의 말없이 떨리는 이 ‘무엇’을 가지고 와 번역의 결과가 되는 언어 뒤에 놓는다...... 말해진 언어는 하나의 몸이며, 살아 있는 피조물이다.
이 글을 읽고 또 읽을 때면 에이전시냐 출판사냐 같은 일차원적인 문제를 떠나 고차원적인 고민을 하는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매당 몇 백 원 더 받으려고 협상하는 대신 이 단어와 저 단어 사이에서, 이 문장과 저 문장 사이에서 몇 시간이고 고민하는 그런 번역가가 되고 싶다.
당장은 의뢰받은 번역을 마감에 맞춰 보내기 급급하고, 또 다른 책을 찾아 눈을 번뜩이고 다녀야 하는 현실 탓에 예술가로서의 삶은 신기루와도 같지만, 더 나은 번역가가 되기 위한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는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나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던 탓에 왜 아이들을 낳기 전에, 시간이 많았을 때 더 열심히 살지 않았는지 회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었으나 늘 불안해했던 나는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불안감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당장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내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관련어를 전공하고 번역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나는 아직도 부럽다.
누군가의 말끔한 번역에 감탄하며 역자의 이력을 들춰봤을 때, 그들이 영문과 출신인 것을 보면 그런 사람들에 비해 한참 부족한 내 내공에 다소 기가 죽는 날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평범하다. 그러나 그 일을 매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10년 후, 20년 후에도 책을 만들고 있다면 결과적으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특별한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평범함을 지속 가능하게 지키면 된다."(김동희 <혼자서, 좋아서>) 같은 말에서 위안을 받는다.
이 세계는 오래 하는 사람이 살아남게 되어 있다. 나는 오래 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그때 다시 얘기해 보는 걸로.
'번역 Life > 번역가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판번역가의 수입 (0) | 2021.10.13 |
---|---|
번역 에이전시와 출판사 (2) | 2021.10.13 |
번역가로 살아가려면/중견 번역가가 살아남는 법 (0) | 2021.10.10 |
프리랜서 번역가의 브랜딩 (0) | 2021.10.09 |
집에서 일 하는 엄마 (0) | 2021.10.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