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에이전시와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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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번역 에이전시와 출판사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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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번역가들의 활동을 염탐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10년 넘게 활동하면서도 에이전시를 통해 일감을 의뢰받는 번역가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역서를 보면 늘 그걸 번역한 이와 그 사람의 이력부터 살피는 나는 역서가 50여 권이 넘는 한 번역가가 00 에이전시 소속인 것을 알고 좌절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번역가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업이나 책 기획 같은 부수적인 부분은 에이전시에게 맡기고 본인이 잘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전략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뭐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한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꾸준한 일감 확보가 가능한지가 문제인데, 브런치에서 발견한 한 번역가를 보니 가능하긴 한가 보다.

 

10년 넘게 바른 번역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바른 번역 소속 번역가는 다른 번역 에이전시와 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이 분은 10년 전 계약을 시작할 때에도 3,500원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실력이 좋았으니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나 같이 A4 1장당 13,000원에서 시작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일부 에이전시에서 가져가는 수수료는 초보 번역가의 경우 과하다 싶을 정도로 높다.

 

많지도 않은 번역료에서 30,40퍼센트를 가져가면 번역가에게 제공되는 금액은 번역하는 데 투입된 노력에 비해 너무 적다.

 

게다가 한 에이전시에서 꾸준히 일을 제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난 출판사와의 직거래를 선호한다.

 

편집자와 직접 소통함으로써 출판계 돌아가는 사정도 파악하고 단순히 번역만 하기보다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는 한 사람으로서 현장감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개인적인 인맥도 쌓아 훗날 기획하고 싶은 책을 내밀 수도 있고.

에이전시에서 주는 책을 수동으로 받기만 해서는 번역하고 싶은 책을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없다.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 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에이전시의 품을 벗어나야 한다. 나 역시 현실은 여러 에이전시와 출판사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에이전시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


 

대학원 재학 시절, 아는 게 정말 없었던 나는 대표적인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여 한 에이전시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에이전시는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돈을 제 때 주지 않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초보 번역가를 상대로 동일한 행각을 벌이는 곳이었다.

 

타인의 순수한 열정을 이용하는 그곳에서 큰 상처를 받은 후 나는 믿을 만한 에이전시와 거래를 했고 그때 정신을 바짝 차린 건지 다행히 그 이후부터는 사기를 당한 적이 없다.

에이전시를 통해 출판 번역계에 발을 디딘 이후 첫째 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부터 일이 잘 풀리면서 1인 출판사 여러 곳과 거래를 트게 되었다(물론 에이전시와 여러 권을 진행한 후였다).

 

그렇게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다보니 수입은 점차 상승곡선을 그렸고 에이전시에서 주는 일은 할 시간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서히 에이전시와는 거리를 두게 되는 거라고, 이제는 그 정도 돈을 받고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하고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동안, 상승하던 수입 곡선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나와 거래하던 1인 출판사의 외서 기획이 중단되었다. 야심 차게 출판 시장에 뛰어든 사장님들은 1년에 책 1권 내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더 이상 기획된 외서가 없다고 했다.

 

단군 이래 매해 불황을 경신하고 있는 출판계의 사정이 한몫했으리라.

그러한 상황에서 에이전시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고 그렇게 나는 지금도 에이전시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일감을 꾸준히 주는 출판사와 거래를 트기 전까지는 불가피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울타리로, 누군가에게는 마지못해 이용하는 수단인 에이전시. 생각하기 나름일 거다.

 

각자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은 다를 테니. 최근에는 양심적으로 활동하는 에이전시들도 있어 눈여겨보고 있다.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기획서를 계속 돌리는 것이 맞을가, 맘 편하게 에이전시에서 주는 일을 받는 게 맞을까?

 

오늘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도돌이표 같은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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