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든,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선 사람이든 ‘단어 암기’는 늘 따라다니는 공부방법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단어를 암기하는 것일까요? 영어를 이해하거나 내뱉으려면 아는 단어가 많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외워도 막상 쓰려면 막히는 게 문제입니다. 즉,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나 상황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찾아 필요할 때 적절히 내뱉는 능력이 부족한 거죠. 그래서 아무리 새로운 단어를 공부해도 늘 쓰는 단어만 반복해서 사용하곤 합니다.
문법공부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공부 방법이 그 원인입니다. 영어 단어의 뜻에 맞다고 여겨지는 한국어 단어를 짝지어 암기하는 바람에 뇌가 이상하게 길들여진 탓입니다. 사실 고유 명사를 제외하고 영어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어를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또한 한 단어에는 수많은 의미가 있는데 사전의 앞부분에 나온 몇 가지 뜻만 암기하고 넘어가면 수많은 문맥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사례를 놓치고 넘어가게 되지요.
그런대도 우리는 단어를 일대일로 매칭 시키는 암기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야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오해 때문이죠. 하지만 실제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적절한 단어를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단어의 수는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 외우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영단어가 하루에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죠. 영어는 상당히 유동적인 언어라 전 세계 사용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생겨나고 또 사라집니다.
uber와 google이 존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I’ll be ubering home(우버 불러 타고 갈게). 이라든지 I’ll google it(구글에서 찾아볼게).이라는 문장 역시 존재하지 않았죠. 현대는 잘 사용하지 않아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온 옛날 사람 같은 느낌을 풍기는 단어들도 있습니다.
모호하게 이해하기
단어공부에서 가장 지양해야 하는 방법은 영한식 공부법입니다. 즉 정확한 한국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이죠. 우리는 그동안 이런 단어 암기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거죠. ‘이 영어 단어는 한국어로는 이런 뜻이다’라는 단편적인 단어학습법으로는 해당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원서를 많이 접하면서, 번역을 하면서 이 부분을 참 절실히 느꼈는데, 조승연 씨의 책에서 다음 구절을 읽고 무릎을 탁 쳤더랍니다.
“사전에는 한 단어에 10개 이상의 의미 풀이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한 단어가 갖는 뉘앙스나 느낌을 말로 다 담아낼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대략 7~10개 정도의 주관적 기준으로 의미를 잘라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지개에는 무한대의 색이 들어 있지만, 이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잘라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그렇다면 사전을 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배열되어 있는 단어의 의미를 그냥 외울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들여보내 다시 합쳐서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원래의 몽실몽실할 느낌을 복원해 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단어가 가진 원래의 몽실몽실한 느낌을 ‘의미의 영역’이라 부릅니다. 한 단어가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예를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별도로 외우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죠. 하지만 다양한 의미도 사실은 같은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해석만 약간 달라질 뿐이지요. 단어를 번역하는 일은 번역가의 몫으로 남기고 우선은 두리뭉실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 바랍니다.
단어의 모호함을 이해하면 문맥상의 의미를 대충 눈치챌 줄 아는 능력도 길러집니다. 원서를 읽을 때나 뉴스를 들을 때, 대화를 할 때 의미를 100퍼센트 파악하지는 못할지라도 대략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요령이 생기는 것이지요. 영어를 쓸 줄 안다는 건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토록 많은 단어는 다 어디 갔을까?
우리는 수많은 단어를 외웠지만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단어는 많지 않습니다. 한국어 매칭식으로 외운 단어는 많지만 막상 해당 단어를 넣어 문장을 구사하려 하면 맞는 표현인지, 이럴 때 이 단어를 써도 괜찮을지 망설여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해당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냥 뜻만 알고 넘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단어를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단어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하는 거죠. 이때에는 하루에 50개씩 암기하자는 목표보다는 한 단어라도 제대로 알고 넘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라도 쓰임새에 맞게 꺼내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저는 그래서 ‘단어 줍기’를 합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라도 사실은 제대로 알고 있던 게 아니기에 하루에 한 단어씩 골라서 영영사전의 의미를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이지요. take, have, get 같은 쉬운 단어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자주 사용되는 이러한 단어들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마 무시한 뜻들이 있답니다.
예컨대, Enjoy라는 쉬워 보이는 단어를 내가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쓸 수 있나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행 간 친구에게 여행을 즐기라고 할 때도,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한 뒤 맛있게 먹으라고 할 때도, 방금 물건을 사고 난 친구에게 잘 쓰라고 할 때도 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모를 보며 노인들은 아이들은 금방 크므로 어릴 때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즐기라는 그 심오하고도 깊은 내용을 Enjoy her/him!이라는 굵고 진한 한 마디에 담아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쉽게 enjoy를 내뱉을 수 있나요?
시험 위주의 단어장을 작성하기보다는 나에게 필요한 단어 위주로 단어 줍기를 해보세요. 이때에는 반드시 사전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사전은 단어의 역사가 모두 담긴 소중한 기록이지만 우리는 사전을 그렇게 꼼꼼히 읽어보지 않습니다. 뜻을 알고 싶은 급한 마음에 영한사전의 맨 위에 나온 뜻 한, 두 개만 혹은 나에게 당장 필요한 뜻만 힐긋 본 뒤 넘어갑니다. 찾은 정성 때문이라도 꼼꼼히 보게 되는 종이사전과는 달리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쉽게 영어 사전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지만 사전만 꼼꼼히 봐도 해당 단어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단어장의 형식은 내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영영사전의 뜻을 적어 놓아도 되고 해당 예문을 적어도 좋죠(한국어 뜻을 적는 것만 피하면 됩니다). 그 영어단어를 떠올렸을 때 두리뭉실하고 애매모호한 느낌을 바로 떠올릴 수 있게만 기록해두면 됩니다. 그리고 이 단어장은 부디 가끔씩이라도 복습을 해줘야 하고요.
단어를 공부할 때 유의해야 할 또 다른 점은 단어의 난이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비(diarrhea)나 설사(constipation)는 의학 용어이지만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기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내 입으로 소리 낼 수 있도록 발음까지 정확하게 익혀두어야 하지요.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초음파(ultrasound), 갑상선(thyroid) 같은 단어는 복잡하고 발음이 어려워 보이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게 되므로 어려워 보인다고 섣불리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어의 역사 들여다보기
앞서 언급한 단어 길들이기 과정을 꾸준히 시행하는 사람이라면 단어의 역사가 궁금해질 것입니다. 사전이 “단어의 역사가 모두 담긴 오래된 일기장”이기는 해도 사전에서 언급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 단어의 역사를 전해주는 책은 웬만하면 사보는 편입니다. 해당 단어의 깊숙한 어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해서 이런 단어가 탄생했는지 그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납니다.
『영단어, 지식을 삼키다』 그런 면에서 참 흥미로운 책입니다. 단어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신화, 상식, 역사, 문화, 과학 등 온갖 분야를 버무려 단어의 흥망성쇠를 보여주죠. 이 책을 읽다 보면 단어의 뒷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이와 비슷한 책으로 박산호 번역가가 쓴 『단어의 배신』 같은 책도 있습니다.
기출 순이나 빈도순으로 정리된 단어집이나 암기법을 소개한 책들과는 달리 언어의 기원과 지식이 담긴 이러한 교양서는 많이 읽을수록 좋습니다. 영단어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죠. 『영단어, 지식을 삼키다』에 실린 단어는 30개로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그중 인상적이었던 bus의 기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어에는 voiture omnibu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voiture는 마차와 같은 '운송수단'이라는 뜻이고 omnibus는 라틴어로 '모두를 위하여'라는 뜻이고요. 즉 voiture omnibus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통수단이라는 뜻입니다. omnibus의 끝음절 -bus는 '위하여'라는 뜻의 접미사인데 라틴어 어법에서 접미사 -bus는 단독으로 의미를 가지고 쓰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영어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voiture는 탈락되며 omnibus가 단독으로 육상의 대중교통 수단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고 이후 omnibus에서 omni-가 탈락하고 bus만 달랑 남게 되어 지금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지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제는 한국어로 정착한 bus라는 단어에 이렇게 깊은 역사가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이 책의 후속편인 『영단어, 욕망을 삼키다』라는 책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읽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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