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한 번씩 '번역가의 서재'를 취재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송합니다. 서재가 없어서요" 하고 거절하지만, 정말 없어서 거절하는 거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다. 믿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참고로 내 작업 공간은 이렇다. 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주방, 오른쪽에는 거실. 앞에는 텔레비전, 옆에는 소파, 발밑에는 멍멍이. 주부미가 철철 넘쳐 난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제목이 너무 요새 트렌드라 자꾸 미루고만 있던 이 책을 드디어 읽고 말았다. '권남희'. 이 이름 세 글자가 자꾸 나를 유혹했으므로 읽지 않고서는 못 배겼던 거다.
생각보다 발랄한 소재들에 300권이 넘게 번역한 노장 번역가답지 않은 젊은 문체. 역시 괜히 사랑받는 번역가가 아니구나 싶었다. 번역과 관련된 글을 더 많이 기대했기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번역에 대한, 번역가의 일상에 대한 책은 이제 시중에 많이 풀렸으니 굳이 거기에 하나 더 보탤 필요는 없겠다 싶다.
50이 넘은 여성 번역가의 번역 이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집순이 그녀의 모습에 겪하게 공감했다가 갱년기를 홀로 건넌 슬픈 이야기에는 울컥하며 엄마 생각을 하다가 자식과의 막역한(?) 관계를 그린 구절에서는 나와 딸의 모습을 비추어도 봤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구슬픈 유머를 구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호쾌함을 잃지 않는 문체에 노라 애프런의 글이 떠올랐다. 문체는 억지로 만든다고 생기는 게 아닌지라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문체를 닮았을 그녀를, 그녀의 삶을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얼마나 벌어야 만족할까
그런데 그렇게 많은 책을 번역해도 역시 번역으로 떼 돈을 벌 수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물론 그녀는 충분히 즐겁고 행복해 보였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번역으로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물론 그러려면 돈 안 되는 책 번역은 그만 두고 돈이 되는 기술번역, 가령 특허나 법률 번역 쪽으로 전향해야겠지만 매일 재미없는 기술번역만 할 자신이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능할 거라고, 돈만 많이 번다면 땡큐지, 했는데 아이가 모양에 맞게 블록을 껴 놓는 게임을 하면서 별표를 억지로 삼각형 혹은 동그라미에 끼어넣으려고 낑낑대며 소리 지르는 걸 보며 아차 싶었다. 나란 인간 역시 그렇게 억지로 쑤셔 넣는다고 아무 데나 들어갈 수 없도록 태어났다는 걸.
물론 이러다가도 정말 돈에 눈이 멀어서 어떤 결정을 할지 모르는 나라며 이런저런 몽상 속을 헤맨 끝에 돈을 얼마나 벌어야 나 스스로 만족할까, 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20대의 나는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대학시절 과외로 버는 아르바이트 정도의 수입 말고 진짜 돈을 벌고 싶었다. 그 맛에 회사 생활을 했을 것이다. 신입사원 시절, 교육만 받고 있을 뿐인데 설 보너스로 과외를 몇 달은 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순식간에 입금되자 이 회사에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마약에 더 취하지 않도록 스스로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금은 그때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벌고 있다.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지만 조금일지언정 꾸준히 벌고 싶다.
얼마나 벌어야 만족할지는 결국 나도 모른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기에. 회사 생활을 할 당시에는 벌이가 많았지만 그만큼 씀씀이도 커지는 바람에 늘 돈 부족 현상에 시달렸었다. 돈이 많아지니 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위해 이래저래 셀프 선물을 많이 하던 때였다.
이제는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기에 그런 쓸데없는 지출이 거의 없다. 아이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책을 사는 걸로 풀고 있고. 책 백권 사봤자 명품백 하나 값도 안 된다(물론 백 권을 한 번에 사는 위인은 못되지만). 아무튼 지금의 나는 이런 단출한 삶이 좋다.
그녀는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이 직업이라는 이 은혜로운 상황을 맞게 된 건 글쓰기와 독서를 하며 존재감 없는 시절을 꿋꿋하게 살아낸 과거의 나 덕분이리라."라고는 권남희 번역가의 말을 위안으로 삼아 본다. 그래도 떼돈을 좀 벌어보고 싶은 욕심은 어찌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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