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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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엄마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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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출간된 역서가 두 자리 수가 되지 않은 초보 번역가였다.

 

주 거래처는 에이전시였기에 책 한 권을 번역하면 100만 원이 되지 않는 돈을 벌 뿐이었다. 나조차도 온전한 직업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가운데 엄마가 되었다.

 

아이의 젖을 물리며 이 아이가 말을 할 때쯤이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아이에게 엄마가 하는 일을 당당히 말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을 하면서.

밤새도록 젖을 물리는 일은 잠이 많은 나에게 고역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가 하는 일이니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유별난 모성애가 있지는 않았으니 우선은 고비를 넘기자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무렵의 나는 일도 육아도 둘 다 차차 나아질 거라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뜨뜨 미지근한 태도를 장착하고 있었다. 몸이 피곤했으므로, 신생아와 함께 하는 하루는 이미 스펙터클 했으므로 특별한 열정을 품을 다른 여유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정은 생각보다 빨리 고개를 쳐들었고, 아이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 산간을 위해 한국에서 친히 방문하신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나는 아이를 낳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열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쭉 해오던 일이었기에, 노트북만 열면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관성의 힘을 이용해 나아갔던 거였을 거다. 

지금은 이렇게 덤덤하게 말하지만 당시의 나는 사실 불안한 마음이 컸다. 일이 끊길까 봐. 가뜩이나 띄엄띄엄 들어오던 일이 아예 뚝 끊기고 말까 봐.

 

그 불안감 때문에 시린 손목을 부여잡고 아이가 자는 틈을 타 꾸역꾸역 일을 했다. 내가 어떻게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멈출 수는 없다며 나를 다독여가며 일을 했다.


크게 무리하지는 않았다. 무리한 일정으로 의뢰가 들어올 만큼 잘 나가는 번역가도 아니었고. 에이전시 담당자는 나의 사정을 알기에 일정이 넉넉한 프로젝트만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조금씩 다시 일을 받기 시작했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온전히 아이와 둘이서만 하루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또다시 새로운 루틴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엄마 껌딱지인 첫째 아이는 옆에만 있어주면 내가 일을 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 아이를 옆에 끼고 들어오는 대로 닥치는 대로 번역을 했다. 그렇게라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2년 반 후 둘째가 태어났고 이번에는 젖먹이 둘째와 한창 미운 세 살인 아이를 데리고 일해야 했다. 한 손으로 젖을 물리고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치는 가운데 첫째 아이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을 했다.

 

아직은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아기와 민감한 첫째 아이의 수발을 들어가며 번역을 하는 것은 어린아이 한 명을 돌보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관성처럼 그렇게 나는 또 꾸역꾸역 번역을 했다.

 


하지만 내 일을 하느라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드는 날에는 끝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지기도 했다.

 

옆에 있어준다고 다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진짜 그냥 옆에만 있어주기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 나는 너무 이기적인 엄마는 아닐까?

 

그렇지만 나의 미래에 투자하는 일이, 나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어떻게 이기적인 일일 수 있을지, 남편은 이런 생각을 안 하지 않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못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돌봄 노동의 경제적인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나는 나 자신의 경제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한 욕심이 컸던 것 같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였고 분명 시정되어야 하는 문제였지만 나 스스로도 집안일이나 육아보다는 나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일에 더 높은 경제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 논다는’ 말만큼 부당하고 차별적인 말도 없다. ‘일하지 않는 여성’은 없다.)



불안감과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던 나를 위로한 것은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라는 책에서 저자 송주연이 인용한 칼 로저스의 말이었다(“칼 로저스는 자기 자신을 어떠한 틀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경험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 자신’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 사람은 보다 온전해진다고 했다.”)

 

나는 밖에서 일하는 워킹맘도 아니고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하는 엄마도 아니었다. 어느 한쪽에도 끼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늘 불안했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춰 내 방식대로 아이들을 돌보며 일하는 방식을 인정함으로써 내가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번역도 주업, 엄마도 주업, 그러니까 나에게는 주업이 두 개였다. 


한 공간에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어떠한 면에서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번역을 하다가 잘 안 풀릴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아이들의 포동포동한 살을 만지작거리며 위로를 받았다.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에는 아이들의 미소와 무조건적인 사랑만큼 효과적인 약도 없었다.

 

하지만 이 꼬마 악마들이 질러대는 소리 때문에 고막이 터질 듯한 순간은 예외 없이 찾아왔고 그럴 때면 빈 종이를 채워나가는 정직한 일만이 나를 위로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진 채 내 마음을 매만졌다.

이 고백은 두 가지 일을 한 공간에서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상호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두 일은 사실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시소의 양끝에서 균형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음소거가 아니라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맞춰 다소 어색한 춤을 추는 일이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어색한 춤을 춰야 할지, 이 춤이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지 모르겠지만 이 두 주업에서 손을 놓기 전까지는 아마 계속되지 않을까. 

 

나는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엄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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