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번역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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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출판번역가의 하루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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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이 코앞이면 마음이 바빠진다.

 

당장 내일이 마감인데 오늘 애들이 아플 수도 있고 애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내가 아플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공식적인 마감 일주일 전을 나만의 마감일로 잡고 일한다. 그렇게 해둬야 무슨 일이 터지거나 갑자기 일하기 싫어질 때에도 무사히 마감에 맞춰 원고를 보낼 수 있다.

시간은 늘 부족하기에 무수히 많은 일이 항상 뒤로 밀리기를 반복한다.

 

지만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를 다시 읽어 보니 직장인보다는 그래도 시간이 많은 것 같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기 위해 혼밥을 먹고 글을 쓰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저자와는 달리, 정해진 업무 시간 내내 회사에 매여 있는 직장인과는 달리, 나는 내 시간을 (아이들의 협조 하에)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 딴짓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물론 가끔 딸아이가 “엄마 왜 일 안 하고 책 봐?”라고 묻기도 한다.

그럼 나는 이것도 일하는 거라고 대답하는데, 명확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번역에 도움이 되기(혹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딸아이의 눈치를 봐가며 키보드를 두드리며 하루치 번역 분량을 끝내도 내 일이 끝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에게는 읽고 쓰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변명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독서는 정말로 내 일의 연장이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또 끌어 모아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관련 단어와 표현을 모으고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기도 하며 마지막 수정 단계에서 내가 놓친 부분이 없나 살피기 위해 《갈등하는 번역》,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같은 문장 고치기 관련 서적을 훑어보기도 한다. 

 



출판번역가의 하루는 번역하기와 책 읽기라는 두 가지 바퀴로 굴러간다.

 

둘 중 하나에 소홀하면 둘 다 잘 굴러가지 않는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원서와 역서를 펼쳐놓고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일이 없을 때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는다.

 

잠이 많아 남들처럼 새벽 시간을 이용해 일을 하거나 아이를 재워놓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몇 시간 일하지 못하는 나라서 깨어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저번 주부터 둘째 아이까지 시설에 들어가면서 8시부터 나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고요한 아침을 맞이한 게 6년 만이다. 들뜬 마음도 잠시, 빨리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어느 새 훌쩍, 점심시간을 향해 다가가고 2시면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한다. 그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들으며 산책하는 기분을 만끽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시 30분을 걸어 집으로 오면 녹초가 된다. 아이들을 씻기고 간식을 쥐어준 뒤 TV를 틀어주고 마저 일을 하거나 책을 보며 글을 쓴다.

그렇게 혼 빠질 듯한 하루가 저녁을 향해 달려갈 때쯤이면 간단하게 요가를 한 뒤 저녁 준비를 한다. 다 함께 또 정신없는 식사를 하고 신랑이 아이들을 씻기고 나면 기나긴 하루가 드디어 끝이 보인다. 양치까지 마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드디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이 모든 일을 소화하고도 나의 에너지가 방전되지 않는다면(사실 방전되기가 일쑤지만) 집안일을 최소한으로 하는 덕분이다.

 

정리정돈이 잘된 공간을 좋아하는 나는 한 동안 내 집의 그렇지 못한 상태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이제는 적당히 손을 놓고 있다. 반짝이는 집까지 꿈꾼다면 내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말끔한 집을 포기하고 내 일을 선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끔은 기나긴 휴가를 꿈꾼다. 해야만 하는 일로 꽉 찬 일상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만 딩가딩가 하는 나른하고도 게으른 시간들로 꽉 채운 휴가.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 내 손길을 조금 덜 필요로 할 때가 오면 내 삶에도 작은 휴식 정도는 찾아올지 모르겠다. 그전까지는 주어진 하루의 틈새 속에 나를 살릴 만한 일들을 심어놓는 수밖에 별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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