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번역가의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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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프리랜서 번역가의 장점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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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녔을 시절, 회식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는 엄마가 가져다준 대야에 밤새 토를 하면서 똑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며 꺼이꺼이 운 적이 있다. 정확한 기억은 사라져 버렸지만 내 입에서 무한 재생된 그 말은 “내가 왜!”였던 것 같다.

 

내가 왜 이 꼴로 살아야 해였는지, 내가 왜 이렇게 술을 마셔야 해, 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던 엄마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무안해서 물어본 적은 없다. 

야근보다도 회식이 잦던 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80만 원짜리 정장을 구입했다. 사회 생활에 대해 나만큼이나 아는 게 없던 엄마와 팔짱을 끼고 백화점에 가서 밋밋하기 그지없는 짙은 감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매장 언니의 수완에 휘말려 80만 원이나 주고 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둘 다 말이 없었다. 뭔가 찜찜하긴 했는데 그걸 누가 먼저 터뜨릴 것인지 서로 눈치만 보는 분위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IMF로 아빠가 실직하면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졌다. 자세한 사정은 몰랐으나 엄마 아빠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나는 우리 집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실감했다.

 

상위권을 맴돌던 언니가 재수를 하면서 집안 분위기는 더욱 침체되었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엄마가 번역 아르바이트나 학원 영어 강사 일을 하면서 나는 자꾸만 엄마의 기분을,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런 시간은 대학 시절 내내 이어졌는데 언니처럼 장학금을 받을 실력이 되지 못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어 쓰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했다. 

 

 

 

 

 


아마 그래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비싼 정장을 사고 집에 오는 길이 내내 불편했던 것은.

 

결국 엄마와 나는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밋밋한 감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환불하고 다른 곳에 가서 조금은 나다운 옷을 다시 사 갖고 돌아왔다. 

 

사실 나는 정장이라는 옷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주중에 어쩔 수 없이 입었던 갑옷 같던 정장을 허물처럼 벗어던지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었다. 일주일 중 이틀밖에 되지 않는 주말을 위해 비싼 청바지를 구입하며 정장 속에서 갑갑했을 주중의 내 몸둥어리를 보듬어주는 게 회사 생활이 유일한 낙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로는 정장을 입을 일이 거의 없기에 지금도 정장, 하면 그때가 생각난다.

 

새로운 생활을 향해 약간은 들떠 있던 나와, 집안 사정에 관계없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나에게 좋은 옷을 입혀 보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약간은 기죽은 채로 사회로 향했던 나의 어설픈 발걸음과 그 후 회사에서 겪었던 무수히 많은 비정상적인 일들도.

느슨해질 수 있는 프리랜서의 특성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장을 입고 화장도 곱게 하고 일하는 프리랜서도 있지만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스스로에게 불편함을 강요해야 할 만큼 의지가 없는 인간은 아닌지라 편안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특혜를 마음껏 즐기는 편이다.

 

정장과 세트처럼 신고 다니던 발 아픈 하이힐도 마지막으로 신은 지 6년이 다 되어간다. 퉁퉁 부은 다리와 발 때문에 20대에도 늘 피로해하던 나는 이제 마흔이 가까운 나이이지만 그때보다 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한다. 

프리랜서 번역가의 장점 중에는 화장실에 맘 편히 갈 수 있는 것, 남의 방귀 냄새를 안 맡아도 되는 것도 있다.

 

지옥철 안이나 회의실처럼 꼼짝없이 한 자리에서 특정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범인을 알 수 없는 방귀 냄새만큼 정체된 공기를 오염시키는 건 없었다. 굳이 방귀 냄새가 아니라도 양복 재킷에 묻은 담배 냄새나 전날 밤 마신 술, 혹은 점심에 반주로 걸친 술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도는 환경은 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집에서 혼자 일하게 된 이후 나는 쾌적한 공기 속에 일할 수 있음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물론 아이들의 응가 냄새로 잠시 공기가 오염될 때는 있지만 내 자식의 응가 냄새와 타인의 온갖 체취는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레벨이 다르다. 

프리랜서 번역가의 장점으로는 회식을 안 해도 된다는 것도 있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여직원 회식이란 것도 있었는데 못된 것만 배운 여상사가 여직원들을 모아 놓고 술만 진탕 마시는 시간으로 우리는 반쯤 마시고 반쯤 흘려버린 술을 법인카드로 긁고 도망치듯 그 비생산적인 자리를 빠져나왔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는 지금, 나는 술 마시고 토하지도, 울면서 주정을 부리지도 않는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내가 좋아하는 모스카토 와인을 식전에 혹은 반주로 한두 잔 마시고 조용히 잠자리에 든다. 정장이 아닌 헐렁한 옷을 입고 브래지어 따위는 하지 않은 채로 담배와 술 냄새 없는 내 책상에서 편안하게 일한다. 그건 절대로 작은 행복이 아니다.

 

앞으로도 프리랜서 번역가의 장점을 마음껏 누리며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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