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번역가의 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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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의 일상

프리랜서 번역가의 먹고사니즘

by 글 쓰는 번역가 2021.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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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핸드폰에 깔린 Yelp, Ubereat, Sealmess, Grabhub, Doordash 따위의 앱을 쭉 훑어본다. 

 

가장 먹고 싶은 건 한국의 분식이지만 한국 분식을 왠지 이곳에서 사먹기가 아깝다. 그래서 지난번에 맛있게 먹었던 카레를 먹기로 한다. 

 

Ubereat에서 결제를 하자 잠시 후 흑인 여인이 음식을 픽업하러 가는 중이라고 알람이 뜬다. 금방 오겠거니 했는데 도착 예정 시간이 아무래도 너무 늦었다. 43분이나 걸린단다.

 

에이, 설마 걸어오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설마가 진짜였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음식은 오지 않았고 그 무거운 걸 들고 걸어오고 있을 여자 걱정, 식고 있을 음식 걱정에 배는 점점 더 고파졌다.

 

하지만 나의 위 사정과는 관계없이 도착 예정 시간은 찔끔찔끔 늦어졌고 주문한 지 2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음식이 오지 않자 참다 참다못한 우리는 주문을 취소했다.

신랑이 급하게 픽업해온 타이 음식을 먹으며 그 음식을 어떻게 되는 거고 그 여자는 어떠한 대가를 받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사이드잡이나 부업으로 대리운전을 하는 한국인처럼 여기 뉴욕 사람들도 우버나 리프트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수입을 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이용해 음식 배달 알바를 하는 건 종종 봤는데 걸어서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까 그 여자는 다리가 엄청 튼튼한 건가, 별다른 수입이 없는 싱글맘은 아닐까, 팟씨유를 입 안에 욱여넣으며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신랑은 나중에 사이드잡으로 그거나 하면 되겠다고 농담을 던졌지만 나는 씁쓸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땡볕에 나가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나는 돈이 안 된다고 징징대지만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물건을 배달하다가 소중한 목숨을 잃기도 하니까.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지만 살다 보면 우리는 우선순위가 전복되는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연봉 1억에 도전하기 위해 무리한 번역가들도 곳곳에 보인다. 결론은?  연봉 1억 원에 도전하셨던 박산호 번역가님, 말도 안 되는 분량을 소화하며 한 달에 천만 원을 버셨던 권남희 번역가님. 결론은 두 분 다 몸이 상할 대로 상하셨다고 한다. 

머리가 터지고 어깨 근육이 파열되지 않고도 하루에 10시간 번역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두 분께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그 분들을 통해 나는 번역이 아무리 좋아도, 실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더라도 번역은 절대로 무리해서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어간다.

 

나는 오전에 네다섯 시간 일하고 오후에는 2-3시간 정도까지 일 하면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보통 3-4시 정도까지 하면 딱 좋다. 물론 돈을 더 벌려면 조금 무리할 수 있겠지만 작년 여름에 동시에 세 권의 책을 번역하다가 머리에 쥐가 나는 경험을 한 뒤로는 가능하면 한 번에는 한 권씩만 번역한다. 

 


오전 3시간만 일한다는 홍한별 번역가님이 부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더더욱 부럽게도 원하는 책만 맡으신다고.

번역가는 두 종류로 나뉜다.  들어오는 일을 웬만하면 전부 받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만 고집하는 사람. 대부분 후자이고 싶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전자에 가까운 상태로 일하고 있을 거다.

내가 로또에 당첨되어 돈을 벌기 위해 번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도 후자의 길을 걷고 싶다. 물론 그때도 번역할 마음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프리랜서의 벌이는 회사원보다 확실히 변변치 않다. 하지만 회사를 다녀본 나는 회사에서 꼬박꼬박 주는 높은 연봉이 가져오는 참사를 잘 알고 있기에 혼자서 사부작 일해도 되는 나의 현재 벌이에 만족한다(물론 번역료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내 일이 지닌 값어치는 충분하다. 

물론 성장 단계가 불확실한 프리랜서이기에 불안하기는 하다. 내가 지금 어떠한 단계를 밟고 있는지 누구도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없다.  프리랜서 번역가인 나는 부지런히 번역하는 책의 권수를 늘려갈 뿐이다. 

 


지금의 나는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지만 내가 주 수입원이 될 수는 없다는 한계는 여전하다. 하루 종일 번역만 하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현재는 불가능한 일인 데다 그럴 만한 체력도 없다.

 

다만 이제는 내 몸값을 지키며 일하고 싶다. 그래야 후배들에게도 면목이 서고 나 자신에게도 덜 미안할 것 같다.
 
번역료를 깎으려는 이들의 입장도 물론 이해가 된다. 뭐든 일단 깎고 보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므로.

 

하지만 번역가들이 받는 번역료가 투입되는 노동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는 사실, 번역하는 몇 달 동안에는 수입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고려해주었으면 한다.

 

정성을 다해 만든 비싼 제품에 흔쾌히 지갑이 열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한 번역에도 모두의 지갑이 활짝 열리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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