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둘의 상관관계를 곧잘 생각하는 것인데 돈과 시간 둘 다 많은 삶을 갈망하지만 현실은 돈도 시간도 늘 부족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젊은 날에는 돈보다는 시간이 많고 어느 지점을 지나면 시간보다 돈이 많아지는 시기가 되다가 다시 시간이 많아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나에게 시간과 돈은 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돈은 ‘내가 버는 돈’이다. 신랑과 나, 우리의 돈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온전히 내 손으로 버는 돈.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의 엄마들은 대부분 내 돈을 번다. 남을 위해 일을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고용한 다. 물론 안 그런 소수의 인간들도 있는데 나는 좀 애매한 카테고리에 속한다.
내 돈을 벌지만 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은 고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내가 버는 돈은 그들을 고용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시간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돈이 없어서 시간도 빼앗기는 꼴이다. 이쯤 되면 잘못된 직업을 선택한 건가 후회를 할 법도 하지만 직업 만족도에는 이상 전선이 없다.
첫째 아이가 만 4살 때 다니던 Pre-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면 백인과 결혼한 동양인 엄마 몇 명, 대다수의 흑인 유모, 소수의 백인 엄마들이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곤 했다.
코로나로 집에서 일하는 엄마들이 많아지면서 그 풍경이 흐려졌지만 코로나가 풀려 그들이 다시 출근을 하게 되면 누구에게 돈이 있고 누구에게 시간이 있는지, 다시 말해 누구에게 시간이 없고 누구에게 돈이 없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풍경이 다시 연출될 거다.
며칠 전 아이를 픽업해 집으로 가는 길 아이가 “엄마는 왜 출근 안 해? 왜 집에서 일해?”라고 물었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으나 다급해진 나는 질문의 의도를 읽어내느라 바빠졌다.
태연한 아이와는 달리 “엄마가 집에서 일해서 좋지?”라는 반 강제적 질문을 던지고 “엄마도 출근할까?”라는 반 협박조의 질문 공세를 퍼부은 나. 아이를 제대로 보는 것도 아닌데 아이 때문에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나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아이의 인정? 사회의 인정?
쉽게 답을 꺼내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나비에 정신이 팔려 방금 자신이 던진 의미심장한 질문은 까맣게 잊은 채 저 앞으로 뛰어간다. 고민은 뒤에 남은 나의 몫. 이제 아이 눈치까지 봐야 하는 건가.
집에서만 일했더니 아이가 엄마가 집에 없는 것도 좋다는 지인의 얘기를 들은 게 엊그제인데...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작업실이라도 알아봐야 할까 보다.
어제는 아이를 픽업한 뒤 비눗방울 키트를 사서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일하기는 글렀다 싶어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와 비눗방울 놀이를 즐겼다.
꽃비 같던 비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시간이 다르게 흘렀던 것도 같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늘 무언가로 채우는 데 급급했었다. 분 단위, 시간 단위로 할 일을 정해 계획대로 착착 처리하는 하루를 보내야만 시간을 알차게 잘 썼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비눗방울을 보고 깔깔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웃음을 주고받는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남짓이었겠지만 내가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한 그 어떤 3시간보다도 큰 자국을 남겼다.
돈이 없어 시간을 빼앗긴다는 억울함 때문에 악착같이 내 시간을 챙기곤 했던 나는 내려놓는 순간의 홀가분함을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은 내 일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었기에 그걸 즐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의 욕구와 나의 욕구가 상충하는 순간은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잦을 테니 어제와 같은 순간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언제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미뤄둔 일들을 영원히 할 수 없어지는 때가 온다. 우리는 가끔 그 사실을 잊은 채 영원을 살 것처럼 살아간다.
아이는 곧 자라서 엄마가 집에 없기를 바랄 테고 이제 엄마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쇼핑을 가려할 거다. 그때가 돼도 나는 돈과 시간을 저울질하고 있을까.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일 속에 파묻히는 건 아닐 런지.
간밤에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꼭 붙잡고 있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꿈을 꿨다. 손에 쥐가 날 만큼 꼭 쥐고 있던 건 시간이었을까, 돈이었을까. 둘 다 아니었을지도. 혹시 비눗방울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만 자랐으면 싶은 아이들의 자그마한 손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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