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 번역을 계약했을 때만 해도 나는 계약서를 꼼꼼히 보지 않았다. 내가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취해 뒷일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번역을 마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제야 계약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출판번역 계약을 하게 되었다면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에 아래 사항들을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기 바란다.
우선 해당 작품이 번역자 본인의 이름으로 출간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열심히 번역한 책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된다면 그것보다 허무한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보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얼렁뚱땅 넘어갔다가 책이 출간될 시점에 은근슬쩍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역자가 표기될 거라 언지해주기도 하니 당연한 사항일수록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둘째, 사전에 조율한 번역료가 제대로 적혀 있는지, 언제까지 입금이 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계약금은 얼마이며 언제까지 지급되는지, 잔금은 언제까지 지급되는지 꼼꼼히 살피기 바란다. ‘역서 출간 후 몇 개월 내 입금’이라는 항목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역서의 출간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무한정 미뤄질 수도 있고 아예 출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소중한 노동의 대가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완전 원고 양도된 후 30일 내에 혹은 15일 내 입금 등의 문구를 넣도록 조율하기 바란다(에이전시의 경우 몇 개월 이상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셋째, 계약금은 반드시 받는다. 무슨 일이든 착수금은 필요하다. 계약금은 상대를 믿고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기본 금액이다. 그런데 출판계에서는, 특히 에이전시를 통해 일을 할 때에는 계약금을 생략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적은 금액일지라도 계약금은 반드시 받기 바란다(물론 회사 규정상 그렇게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에이전시도 있다). 계약금은 대략적인 번역료에 따라 50만원~100만원까지 다양한데, 계약금을 받지 않을 경우 번역이 완료될 때까지 수입이 전무할 수 있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증정본 관련 사항이다.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제공하는 증정본은 3권에서 5권까지 다양하다. 딱 1권만 주는 경우도 있는데 가능하면 최소한 3권으로 협상하는 편이 좋다. 증정본을 받아서 주위에 선물하면 내 홍보도 하고 주위의 인심도 살 수 있다. 번역가의 위상을 살리는 데 이보다 좋은 수단도 없는 것이다.
참고로 번역가가 번역료를 지급받는 방식은 매절과 인세 두 가지다.
매절이란 최종 원고 매수에 따라 번역료를 산정하는 방식이다. 가령 원고지 1장 당 3,500원으로 계약했을 경우 최종 원고가 1,000매가 나왔다면 번역료는 3500,000원이 되는 것이다. 원고 매수는 한글 프로그램의 문서 정보-->문서 통계에 가면 볼 수 있다(출판계에서는 워드가 아닌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원고지 1매에는 200자가 들어가며 번역료는 원서가 아닌 한글 번역본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매절은 가장 정직한 방법이자 내가 들인 노동의 대가를 확실히 보장받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번역가가 이 방법으로 계약한다.
인세는 판매량에 따라 번역료를 지급받는 것이다. 우선 계약금을 선인세로 받고 나머지는 판매량에 따라 인세를 지급받는 것이다. 잘 팔릴지 예상할 수 없는 소설을 국내에 들여오면서 번역가에게 인세로 지급받을 것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종의 도박이 될 수 있다. 잘 팔리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매절로 계산한 것보다 훨씬 더 적은 수입밖에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번역료를 인세로 받는다는 결정은 큰 모험이다. 특히 생계형 번역가의 경우 당장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번역료를 기다리며 손가락 빨고 있을 수는 없다. 책이 얼마나 큰 인기를 끌지 알 수 없는 데다 요새처럼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인세 계약 방식은 위험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시크릿》을 번역한 김우열 번역가는 책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에도 매절로 계약하는 바람에 큰돈을 벌지 못한 경우다. 반면 《세계대전 Z》를 번역한 박산호 번역가의 경우 매절로 계약해 아직까지도 쏠쏠한 인세를 받고 있다고 한다. 모험을 선호한다면 그리고 자금 상의 여유가 된다면 인세에 도전해 봐도 괜찮다. 물론 내가 일한 만큼 보장받기를 바란다면 안전한 매절을 선택하는 게 좋겠다.
매절과 인세를 결합한 방식도 있다. 번역이 완료되면 일정한 금액(매절 금액보다는 적은 액수)을 지급받고 그 후부터는 판매량에 따라 추가로 인세를 받는 방식이다. 나 역시 한 번 그렇게 진행한 적이 있다. 우선 200만원을 받고 나머지는 매 년 인세로 지급받았는데, 책의 판매량은 그저 그랬고 매절로 계약한 비용과 비슷하게 번역료를 받기는 했으나 할부로 찔끔찔끔 받다 보니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그 후로 반인세 계약 방법은 피하고 있다.
번역료 입금 날짜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번역가는 최종 원고를 납입한 후에야 번역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1, 2개월에서 길게는 3,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계약금만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하고자 일부 출판사에서는 번역해서 넘긴 양만큼 먼저 계산해서 번역료를 지급해주기도 한다. 번역가 입장에서는 번역한 만큼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번역가가 지급받는 돈은 총 번역료에서 3.3퍼센트의 세금을 제한 금액이다. 번역가는 프리랜서로 등록되어 3.3퍼센트의 세금을 내게 되는데 5월에 종합소득 신고를 통해 세금 신고를 하면 이 세금 부분은 거의 대부분 돌려받게 된다. 번역가의 소득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슬픈 이유 때문이다.
초보 번역가라면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다. 바로 샘플 번역이다. 생각보다 많은 번역가가 이 샘플번역에서 좌절을 맞본다. 나 역시 에이전시에서 샘플번역을 두 번 정도 탈락한 뒤 첫 책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초보 번역가가 샘플번역에 쉽게 통과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쟁쟁한 번역가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초보 번역가는 경험도 실력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번역가를 제치고 일감을 따려면 우선 가독성에 최대한 공을 들여야 한다. 원서를 읽지 않고도 마치 한국어로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히면 출판사의 선택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자신의 번역문을 최소한 20번 이상은 읽어보며 걸리는 부분이 없을 때까지 다듬기 바란다.
가제 선택에도 신중을 기하면 좋다. 보통 제목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번역가의 센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므로 시간을 들여 고민하기 바란다. 단어의 기본적인 뜻에만 얽매이지 말고 약간의 창의력을 허락하면 좋다.
모르는 표현은 뭉뚱그려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뜻을 명확히 파악해 번역해야 한다. 자신이 모르는 표현이 나오거나 해석이 잘 안 되는 부분은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은 심리가 작용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다른 번역가들과 비교되기 좋은 부분이자 오역이 나기 쉬운 부분이다. 그런 부분일수록 집요하게 파고들어 말끔하게 번역해야 선택될 확률이 높아진다.
번역문의 장르를 고려할 줄도 알아야 한다. 번역문은 장르마다 문체가 다르다. 경제경영서는 깔끔한 문체, 에세이나 소설은 유려하면서도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만한 문체가 필요하다. 그 사실을 유념한 상태에서 번역을 하기 바란다. 자신이 맡게 된 장르의 번역서를 읽어보며 어떠한 단어를 구사하는지, 문체는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도 좋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점검은 필수다. 맞춤법에서 실수가 있으면 당연히 첫인상이 좋지 않다. 띄어쓰기도 마찬가지다. 단 띄어쓰기의 경우 출판사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100퍼센트 정확한 띄어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번역문 내에서만은 반드시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샘플번역에 여러 번 떨어졌다고 낙담하지 말기 바란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10년 차 번역가인 나 역시 아직도 샘플번역에서 탈락할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그 책이 나와 인연이 아니었구나 하며 훌훌 털어버리고 또 다른 책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https://libraryoftranslatorj.tistory.com/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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