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판번역 입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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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Life/번역가 되는 법

나의 출판번역 입문기

by 글 쓰는 번역가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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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학년 1학기를 마친 여름 방학, 나는 인터넷 구인 광고를 뒤져 출판 에이전시를 찾았다. 지금이라면 조금 더 철저하게 알아봤겠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일을 주는 것만으로 감사해 덥석 일을 받았다.

 

번역료는 생각보다 적었다. 들은 정보에 따르면 원고지 한 장 당 최소 2천 원은 되어야 했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가격이었다. 사장은 번역가가 되려면 책 리뷰도 많이 해봐야 한다며 10권에 달하는 책을 보수 없이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관행이라지만 아무리 적을지언정 수고비도 주지 않고 그런 것을 부탁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 아니었을까.

 

첫 책은 공역이었고 번역료는 두 달 후에 입금되었다. 그 후에 또 다른 책을 공역으로 진행한 뒤에야 온전한 책 한 권을 의뢰받았다. 그때 번역한 책 중 한 권은 몇 년이 지나서야 출간이 되었는데 에이전시에서는 연락조차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편집자가 수정을 보았을 텐데 기본적인 실수가 곳곳에 보였다. 학생 때 번역한 거라 내 실력도 많이 부족했지만 오탈자 같은 건 편집자가 잡아줬어야 했는데 여러모로 아쉬웠다. 그 책의 번역료는 절반은 반년 후에, 다음 절반은 또 반년 후에 받았다.

 

다른 사람이 번역하다가 포기한 번역문을 재검토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도 있었다. 엉망진창인 문장들이 꽤 골머리를 앓게 했지만 책임감 때문에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번역을 마쳤건만 정작 더 큰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역료가 지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씩 연락해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해보았지만 담당자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잘도 피해갔고 지친 나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번역을 마친 시점이 2013년이었으니 거의 10년 전 이야기다.  

 

그 에이전시에 호되게 당한 이후 에이전시 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초짜 번역가가 책을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혹시나 나중에 번역을 맡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출판사에서 의뢰하는 책 리뷰 작업도 여럿 했지만 쉽게 책 번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또다시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알아봐서 인지도가 나쁘지 않은 에이전시를 선택했다. 에이전시이기 때문에 내 손에 주어지는 번역료가 많지는 않았지만 계약서상에 명시된 대로 꼬박꼬박 입금되었고 자체 편집부의 교열로 나 또한 많이 배웠다.

 

하지만 에이전시와만 계속해서 거래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들쑥날쑥한 수입인데 절대적인 금액마저 너무 낮다면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온라인 카페나 편집자 사이트를 통해 나라는 번역가를 알리는 일을 매 년 반복했다. 허공에 대고 혼자 발길질하는 기분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니 1인 출판사 몇 곳에서 먼저 의뢰가 들어왔다. 믿을 만한 번역가를 찾지 못해 고생하고 있는 1인 출판사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다.

 

브런치와 인스타를 시작한 이후로는 출판사에서 먼저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역서가 쌓인 시간만큼 나라는 번역가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언제 일이 끊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에이전시의 손을 아예 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제는 출판사와 직접 거래를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출판사와의 거래를 선호하는 나이기에 역서가 충분히 쌓인 뒤에도 에이전시와만 계속해서 거래하는 번역가가 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충격에 휩싸였다. 역서가 50권, 100권이 넘어가는 데도 에이전시를 통해서만 일을 맡는 것을 보고 굳이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배우가 소속사를 두고 활동하는 것처럼 번역가 또한 괜찮은 에이전시와 계속해서 거래하는 것 또한 나름의 생존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질의 에이전시와 거래한 적이 없던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

 

 

그렇다면 에이전시와 거래하면 어떠한 점이 좋을까?

 

에이전시와 단단한 관계를 맺어둘 경우 안정적인 일감 확보가 가능하다. 마감을 잘 지켜 성실히 번역문을 제출할 경우 에이전시로부터 안정적으로 일을 의뢰받을 수 있다. 내가 굳이 나 자신을 홍보하지 않아도 에이전시에서 알아서 일을 물어다 주는 것이다.

 

에이전시와 일할 경우 출판사에 넘기기 전에 내 번역문이 한 번 걸러진다는 장점도 있다.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을 한 번 더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뒤 에이전시를 통해 출간했던 나의 초기 역서들을 돌아 봐도 부끄럽지 않다면 그건 나의 부족한 실력을 메꿔준 에이전시 덕분일 것이다.

 

어떠한 에이전시와 거래하는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에이전시를 이용하면 번역료를 떼이는 일을 피할 수도 있다. 번역료를 지급 받는 시기가 좀 늦어질 수는 있지만 너무 영세한 출판사와 계약하는 바람에 아예 번역료를 떼이는 경험은 피할 수 있다. 특정 에이전시의 경우 업계 최소 번역료를 보장받을 수도 있다. 최근에 생긴 작은 에이전시들은 그러한 면에서 대형 출판사보다 나은 편이다.

 

하지만 특정한 에이전시는 다른 에이전시와의 거래를 금할 뿐만 아니라 출판사와 직접적인 연락을 취하는 것도 금한다. 출판계 관계자나 편집자와 개인적인 인맥을 쌓기가 힘든 것이다. 스스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에이전시라는 울타리 안에서 활동할 경우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 또한 에이전시에서 일정한 수수료를 가져가기 때문에 출판사와 직접 거래할 때에 비해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에이전시와 출판사를 골고루 활용하기를 권한다. 어느 정도 역서가 쌓이면 출판사와 직거래하는 편이 좋겠지만 출판사에서 1년에 출간하는 책의 종수는 정해져 있고 해당 출판사가 거래하는 번역가가 나 한 명만은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와만 거래해서는 일감의 수급이 불안정할 수 있다. 실력이 출중해 출판사에서 앞 다퉈 일을 의뢰하는 경우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에이전시와 출판사 모두와 거래하는 것이다.

 

에이전시와 거래하든 출판사와 거래하든 나의 몸값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역서가 쌓여가는 데도 번역료가 그대로라면 번역가가 먼저 번역료 인상을 요구해야 한다. 가만히 있는데 먼저 번역료를 올려주겠다고 하는 클라이언트는 없다. 물론 그러려면 그에 맞는 실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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